[문화카페]
20여년 전 나는 중앙의 모 일간지에 양자강 기행을 연재한 적이 있다. 아미산의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 긴긴 장강의 물줄기를 따라내려 상해의 황포강에서 노을을 보며 마친 대장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경승지와 유적들을 보고 느꼈지만, 세월이 가면서 대부분 그렇고 그런 희미한 잔영으로 퇴색해가고 있다. 하지만 어떤 장면은 희한하게도 시간과 반비례하며 나의 가슴 속에 또렷하게 뿌리박고 있다.
조자룡이 조조 군사와 격전을 벌였던 당양의 장판파를 갔을 때다. 나는 기진맥진 수소문 끝에 유비의 부인인 미부인이 투신자결했다는 미부인정(?夫人井)을 찾아갔다.
유비의 아들 아두(阿斗)를 안고 피란하던 미부인이 부상을 입자, 아들을 조자룡 장군에게 맡기고 자신은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는 바로 그 우물이다. 당양 변두리의 허름한 농가의 울안에 있는 미부인정은 너비 서너 뼘 정도에 깊이는 4미터 정도로 난간도 없이 함정처럼 방치한 채 사용하고 있었다.
인정이 증발된 시대
파란만장한 역사의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난에 찌든 기색이 역력한 초로의 부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객을 대했다. 호기심도 호들갑도 없다. 세상사 흥망성쇠를 두고 일희일비한들 무엇하랴는 눈빛들이다.
지식도 철학도 없을 한촌(寒村)의 민초들이 어쩌면 저렇게 평온하고 도사처럼 여유로울 수가 있을까. 그때 내 스스로의 답은 오히려 가난이었다. 전별의 정으로 내가 10원을 굳이 건네준 그들의 한 달 생활비는 당시 한화로 천 원 안팎인 7원이라고 했다.
유사한 일들은 당양에서만이 아니었다. 운남성 여강 인근의 시골에서도 비슷했고, 적벽대전의 남병산 인근 마을에서도 그랬으며, 특히 20여년을 드나들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빈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해 우리 공연단 일행이 카자흐스탄의 소도시인 잠불에 머물 때다. 고려인 민가에서 단원들이 묵고 있는데, 어느 허름한 옷차림의 60대 아주머니가 발을 절룩이며 겨드랑이에 무엇을 끼고 천천히 다가왔다. 놀랍게도 살아있는 닭이었다.
고생들 하는데 줄 건 없고, 이거라도 삶아 먹으라고 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얼마나 굴곡진 역사를 버텨오고, 얼마나 핍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온 고려인들인데….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고래의 순박했던 인정만은 유전질처럼 남아 있어, 그처럼 소중히 기르던 씨암탉까지 가져오다니!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근래에는 어데를 가도 가슴에 앙금으로 남을 뭉클한 인정 얘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다니던 지역을 찾아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물신풍조 벗어나 인간미 찾자
더는 성역처럼 남아있는 인정지대는 없는 것 같다. 카자흐나 우즈벡의 오지를 가도, 양안원성제부지(兩岸猿聲蹄不住)의 사천이나 운남을 가도 이제 씨암탉 내는 인정은 모두 증발되고 말았다.
사람의 천성이 바뀌어 그런 게 아닐 게다.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그 요상한 바람만 들어가면 모든 게 변하고 만다. 돈 좋아하는 물신풍조가 곧 그것이다. 지난 세기 90년대만 해도 중앙아시아를 드나들 때면 툭하면 눈물을 흘려야 했다. 만나는 기쁨과 헤어지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좀해서 눈시울을 붉히는 장면을 경험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 물결이 저들의 가슴을 조약돌처럼 단련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물질문명이 인간미를 좀먹어가는 사례를 누누이 경험하면서, 나는 내 나름으로 터득한 진리(?)가 있다. 한참 전부터 ‘한스 독트린(Han's doctrine)’이라고 농반진반으로 허장성세를 부리며 주장하는 ‘GNP와 인간미는 반비례한다’는 명제(命題)가 곧 그것이다.
하늘지향적인 용의 해를 맞아서, 지상지향적인 물신숭배에만 매몰되지 말고, 우리 한 번 ‘GNP와 인간미는 비례한다’는 새 시대의 새로운 명제를 구현해 봄은 어떨까.
한 명 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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