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걷다] 재력가 모여살던 富村 ‘인천판 성북동’

인천시 중구 송학동

 

송학동은 부자 동네였다. 사람 키 서너 배 넘게 쌓은 돌축대와 담쟁이로 둘러싸인 높은 담장, 그리고 넓은 정원과 육중한 철문.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저택들이 바다를 향해 자리잡고 있었다.

 

어쩌다 자유공원에 놀러갔다가 그곳을 한번 기웃거리기라도 하면 대문 앞에서 자가용을 닦으며 사장님을 기다리던 운전수의 눈초리가 여간 무서웠던 게 아니다.

 

실제로 4·5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씨 등 고관대작이나 항만관련 사업을 하던 경제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서울사람들이 이 동네를 지나가면서 ‘인천에도 성북동 같은 동네가 있네’ 하고 의아함과 놀램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동네가 바로 송학동이다.

 

100년 추억의 아카이브, 홍예문

송학동은 동네 자체가 그리 크지 않다. 게다가 ‘송(松)’ 자로 시작하는 송현동, 송림동, 송월동과, ‘학(鶴)’자 돌림의 청학동, 선학동, 문학동과 헷갈려 정작 인천 사람들도 그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중구 송학동은 자유공원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앞 쪽으로 막힐 게 없어 인천 앞바다가 고스란히 보이는 양지바른 곳이다.

 

반세기 동안 송학동의 모양은 많이 변했지만 이 동네의 풍치를 그런대로 간직하게 하는 것은 100년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돌문 때문이다. 이 문은 윗머리가 무지개 형상을 했다고 해서 홍예문(虹霓門)이란 예쁜 이름을 얻었다. 이름에 걸맞게 담쟁이 넝쿨이 계절에 따라 고즈넉한 풍광을 연출하고 있지만 이 문은 슬픈 역사를 품고 있다.

 

1883년 개항 후 중앙동, 신포동 일대에 터를 잡은 일본 거류민들은 전동과 만석동 방면으로 그 영역을 넓히기 위해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문을 내게 된다. 일본조계에서 경인철도의 축현역(현 동인천역 부근)으로 우마차를 이용해 물건을 쉽게 옮길 수 있는 지름길도 필요했다.

 

1905년 일본 공병대가 암석 폭파 등 토목공사에 앞장섰고 중국인 석수장이와 한국인 노무자를 동원하는 등 난공사 끝에 3년이 지난 1908년에 완성했다. 지금도 문 앞 벽에는 쪼아내다 만 거대한 암석의 뿌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응봉산 마루턱에 있는 홍예문은 한때 인천의 풍광을 갈라놓았다. 북쪽의 송현동, 화수동의 허름한 집들과 남쪽 송학동, 중앙동 쪽의 이국풍 저택들이 대비감을 주었다. 항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원한 골바람이 불어 여름철에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겨울이 되면 이곳은 눈썰매장이 된다. 개구쟁이들은 비닐 포대를 타고 이곳에서부터 하강하기 시작하면 단숨에 아랫동네 중앙동까지 다다른다.

 

홍예문에는 전설 같은 사연들이 있다. 고일 선생이 쓴 ‘인천석금’에 따르면 해방 후 송건영이라는 청년이 영화에서 본대로 우산을 쓴 채 이곳에서 뛰어내렸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 60년대 기계체조 선수였던 유병덕(당시 61세)씨는 가끔 홍예문 위 난간을 잡고 물구나무서기를 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간을 콩알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재밌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홍예문의 높이는 13m이다.

70~80년대 까지만 해도 시내에서 이만한 높이의 개방된 건축물이 별로 없었다. 이게 문제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 사고가 이어지자 이후 높다란 철책이 둘러쳐졌다.

 

당시 동인천 쪽으로 통학하는 인성여고생들은 자살사건이 나면 한동안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신포동 쪽으로 돌아서 다니곤 했다.

 

10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6.7m의 폭은 그대로다. 당시 우마차는 교차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자동차로는 어림없다. 이 돌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잠시나마 서로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라고 묵묵히 얘기 하고 있다.

문화재급 공원매점

홍예문 위쪽에서 신포동 쪽으로 내려가면 이국적으로 생긴 내동 성공회성당이 나온다. 성당이 위치한 응봉산의 동쪽 줄기를 예전에는 약대이산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약대인(藥大人)산에서 와전된 것이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당시 인천인들의 마음속에는 거봉으로 우뚝 솟아있다. 미국인 청년 랜디스는 뛰어난 의술과 따뜻한 인간애로 병으로 신음하던 많은 인천사람들을 위해 불철주야 진료활동을 펼쳤다. 밀려드는 환자를 혼자 감당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안타깝게도 1898년 32세의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약대인(藥大人)이라고 불렀다.

 

그는 죽어서도 인천을 떠나지 않았다. 현재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묘지 양지 바른 곳에 잠들어 있다. 성당 뜰에는 한때 이곳이 ‘성(聖)누가병원’이었음을 알리는 ‘영국병원’이란 오랜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바다와 항구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자유공원은 한때 인기 있는 신혼여행지였다. 이제는 소일거리 없는 노인들이 공원에 나와 ‘왕년에 내가 말야…’ 하며 서로 말동무를 자처한다.

 

수도권에 사는 사람치고 맥아더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데올로기 논쟁에 지친 것일까, 아니면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서일까. 월미도쪽을 응시하고 있는 장군의 눈매도 이젠 힘이 없어 보인다.

 

이 공원의 풍경을 더욱 더 빛바랜 사진처럼 보이게 하는 소품 중 하나는 공원매점이다. 학도의용대 기념탑 옆에 있는 정자처럼 생긴매점은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사한다.

 

반가운 마음에 매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집이 몇년이나 됐습니까?” “공원에 놀러 오는 할아버지들이 그러시는데 50년은 족히 됐고 60년이 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데요.” 아, 문화재감이네. 온 식구가 공원에 나들이 오는 날은 분명 집안에 경사가 있거나 먼 곳에서 친척이라도 온 날이다. 그날 아이들은 이 매점에서 평소에 갖고 싶었던 장난감 총이나 바비 인형을 하나 챙겼으리라.

매점 옆에는 철제 탑이 높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TV난시청 중계탑이고 또다른 하나는 8개의 확성기가 달려 있는 ‘사랑의 탑’이다. 1965년 인천로터리클럽에서 세운 이 탑은 80년대 말까지 매일 밤 10시만 되면 사방팔방으로 ‘계도방송’을 했다. “청소년 여러분,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부모님이 기다리시는 가정으로 속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공원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갈 정도였다. 당시 계도방송을 들었던 청소년들은 이제 자신의 아들, 딸, 혹은 손녀, 손자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는 나이가 될 만큼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낯가림 심한 송학동

공원광장에서 남쪽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중간에 양철지붕을 얹은 서양식 건물 하나가 있다.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의 설계로 1901년 세워진 제물포구락부이다. ‘구락부’라는 말은 영어 ‘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에 의한 것이다.

 

주한 미국공사 알렌의 부인이 은제 열쇠로 출입문을 여는 것으로 활동이 시작된 이곳은 1913년까지 독일, 영국, 러시아, 미국 등 서양인들의 사교장으로 사용되었다. 내부에는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 등이 있고, 밖에는 테니스장이 있었다고 한다. 보름마다 무도회를 열면서 식사도 하고 춤도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 이곳은 천장에 샹들리에를 달고 한쪽에는 당시 분위기대로 외국인들이 차와 술을 마시던 바를 되살려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새롭게 오픈했다.

 

4대의 대형 화면에서는 경인선 개통 모습, 러·일전쟁의 모습 등 한 세기 전 시대 상황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있다. 이 건물이 유명세를 탄 것은 2001년 김하늘과 고수가 출연한 드라마‘피아노’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한동안 드라마 촬영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문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구락부 아랫길에는 일본식 주택이 아직 몇채 남아있다. 그중에는 수아(김하늘 분)의 집으로 나왔던 파란대문집도 있다.

 

드라마가 한창 상영될 때 담쟁이넝쿨을 뒤집어 쓴 이 2층 집은 팬들이 적어 놓은 글씨로 빼곡했다. 10년이 되었건만 봄 햇살을 받은 창문으로 수아가 해맑은 얼굴을 내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수줍음 많은 수아처럼 송학동은 아직도 낯가림이 심한, 그런 동네다.

글 _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사진 _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