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작가 김세현(49)은 등산 바지와 등산화 차림이었다. 껑충한 키에 배낭까지 짊어진 모습이 자유로워 보인다. “기본적으로 나그네 같은 심정을 버릴 수 없다”는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현대판 나그네 같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말끝마다 여운이 남는 묘한 어투. 조용하면서도 느릿하게, 단어를 하나씩 곱씹으며 이야기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김세현은 그림 그리는 작가에서 글과 그림을 창작하는 작가로, 여백의 공간에 담긴 동양의 정서가 그와 그의 그림을 거쳐 글로 옮겨가려는 찰나에 서 있다.
■동양을 그리는 동양인
김세현의 양평 작업실은 아담한 뜰을 갖춘 단층집이다. 거실 한 면을 채운 유리벽을 통해 북한강이 내려다보였다. 뜰에는 멍청하게 생긴 돌상 대여섯 개가 줄지어 서 있고, 개중에는 이끼가 껴 얼굴이 퍼렇게 변해버린 것도 있었다. 커다란 엽전을 엎어둔 듯 둥글 넓적한 돌 탁자와 뭉툭한 돌 의자 위로 나뭇가지에 걸어둔 풍경이 간간이 울렸다.
거실 옆에 딸린 화실은 한쪽 벽은 책장이, 다른 한쪽 벽은 직접 쓴 서예가 가득 붙어 있다. 우줄우줄한, 그의 말마따나 ‘졸렬’한 글씨체는 저마다 크기와 농담이 달라 오히려 리듬감이 있어 보였다. 거실과 부엌 벽엔 발표하지 않은 그의 민화풍 작품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다. 작업실 곳곳이 ‘나는 안팎으로 동양인입니다’라고 속삭이는 듯 했다.
김세현은 동양화 삽화로 잘 알려진 그림책작가다. 권정생, 정채봉 등 유명작가의 동화와 백석의 시를 바탕으로 깊이 있는 수묵담채화와 여기에 강렬한 색감을 더한 민화풍의 삽화를 곁들이며 활동해왔다. 1999년 그림책을 시작한 이래 왕성히 활동하지 않았음에도 2004년 제4회 한국출판미술상을 받고, 2009년에는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 원화 전시작가로 선정된 등 그림책작가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독특한 구도와 실험적 화법, 동양화라는 기본 틀 위에서 그림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책장마다 묻어나기 때문이다.
■동양의 정서가 스며든 그림책
“그림책작가가 되겠다는 것보단, 동양화의 한국적인 부분을 어떻게 체득하고 소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항상 중심에 있었어요. 그림책은 어떻게 보면 생계를 위한 일이었고요.”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5년여 간 미술교사로 교직생활을 하다 그만뒀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 자신을 분명하게 비춰보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과 교류하다 출판사에 소개를 받았고, 그렇게 그리게 된 작품이 권정생의 글 ‘만년샤쓰’(1999, 길벗)다. 만년샤쓰의 삽화는 동양화의 느낌이 짙은 그의 화풍과는 거리가 멀다. 일반 그림책의 삽화 같은 문안한 느낌이지만, 독특한 구도가 눈길을 끈다.
엉뚱한 데서 인물이 잘려나가고, 실루엣으로 표현한 부분도 있다. 첫 작품임에도 아무런 참고 없이, 자신이 이해한 화면과 느낌을 그려넣었다. 이후 신문삽화, 단행본작업 등 그림책과는 다른 일을 주로 하다 2006년 백석의 ‘준치가시’(창비) 작업을 시작한다. 준치가시는 그가 그림책에 대해 새로이 눈을 뜨게 한 작품이다.
“여러 시도를 했어요. 수묵화로 그려보고, 수묵과 채색을 혼용해 그렸지만 다 그려놓고 포기했죠. 그러다 민화가 가진 대담함, 자유로움을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마지막으로 채색만으로 그렸죠. 전통민화가 가진 못난 느낌을 어떻게 백석시와 접목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만든 그림이고, 내 그림이 변화해가는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이후 ‘엄마 까투리’(2008, 낮은산), ‘꽃그늘 환한물’(2009, 길벗어린이) 등의 그림을 그리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텍스트마다 새로운 옷을 입히는 김세현만의 동양화풍 그림책을 완성해나간다.
“오랜 문화에 축적된 동양적 색감에 국한하지 않고, 지금 시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색감과 정서를 함께 호흡하고 싶어요. 어린이에게 동양이 갖고 있는 정서가 자연스레 스며들 수 있게끔 그림책으로 징검다리역할을 하고 싶고요. 서구적 그림책, 서구적 방식도 중요하지만, 우리만의 것도 아이들의 공간에서 한 축으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온전한 그림책 작가로 가는 길
지난해 그는 그림을 전혀 그릴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졌고, 한 달 간 인도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접한 화려하고 다채로운 동양의 색이 그림으로 스며 나올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대신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썼다. 그림과 더불어 글을 쓰는, 그가 생각하는 ‘온전한’ 그림책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시기다.
“어떤 물건을 쓸 때 견고하고 단단하다거나, 손에 잡았을 때 명확한 느낌이 들면 그 안에서 충만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자신이 쓰는 도구가 명확하지 않을 때, 비질을 해도 제대로 쓸어담지 못하는 느낌이 들죠. 다른 작업이 그랬다면, 그림책은 뭔가 담기는 느낌, 채워지는 확신이 들어요.”
화실엔 그의 두 손바닥 크기의 연습장 수십권이 쌓여 있다. 글을 쓰기로 한 이래 연습장을 들고 다니며, 일상에서 발견하는 소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는 게 습관이 됐기 때문이다. 심오한 사상보단,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서로 간에 ‘튼튼한 끈’이 묶여 있다는 생각을 글과 그림으로 즐거이 전달하는 게 꿈이다. 그림책 작가에서 ‘온전한’ 그림책 작가로 향한 길목에서, 김세현에게 그림책이란 뭘까.
“대학시절 철학 시험을 보는데, 자신의 미래를 논하라는 문제였어요. ‘나이 50은 돼야 인생도 좀 알고, 세상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썼는데, A플러스를 받아 깜짝 놀랐죠. 그 나이가 되고 보니, 그림도 나이에 따라 가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지금까지 해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항아리에 담아 하나로 묶어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해요. 그 항아리가 바로 그림책이죠.”
성보경기자 boccu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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