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4월 8일 주일)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의 틀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축일을 감사와 설레는 마음을 갖고 다양한 방법으로 지내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결코 우리가 초월적 삶을 추구하는 존재로의 의식 전환이 없이는 받아드릴 수 없는 대사건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논란은 어느 시대에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절체절명의 논쟁거리입니다.
인간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신앙이 사실주의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에는 불가능하지만 옛날 구약성서의 이사야서 26장, 에제키엘서 37장, 다니엘서 12장 등에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에 대하여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 부활 신앙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결정적 신앙의 틀로 확증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예수의 제자들은 이 부활사건을 믿음의 중심으로 여겼고, 이를 확증하는 사건들, 즉 요한사도만을 제외하고 모든 제자들이 용감하게 순교를 합니다. 라틴어에는 순교자를 ‘martyr(마르띠르)’라고 합니다. 이 ‘마르띠르’란 의미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확신을 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핵심을 부활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자들 모두는 사도들에 의해서 전래되는 사도신경을 외울 때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습니다”라고 힘차게 고백하곤 합니다.
과학자들이 자연의 원리와 진화의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인간이 추구하는 여러 기술을 동원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세상 원리가 1차원에서 11차원까지는 있을 것 같다고 하는데 현재 우리가 깨우쳐 아는 것은 고작 3차원의 세계 즉 3D라는 영화의 기술에 머물러 있습니다. 또 한편 물질과 생명의 기본 원소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생명의 기본 원소가 무엇인지 즉, 이를테면 신의 입자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확증이 없는 입장에 머물러 있습니다.
뽕잎을 갉아 먹는 누에가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나는데 누에들은 선배들 격인 나비들의 존재 양식과 생활 방식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느껴지는 것이 우주의 이치이건 물질의 원리이건 결국 무(無), 즉 아무것도 아닌 라틴어의 Nihil(니힐)이란 영역에 도달하게 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물음에 봉착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또 다른 우주로 즉 다중우주로 나아가고 결국엔 무(無)만이 있게(?)되는 결론에 봉착하거나 또 생명체의 원리도 들어가 보면 결국 무(無)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결론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과학의 논리로 풀어 갈 수는 없고 철학적이거나 종교적 원리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하느님만의 영역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 다다르게 됩니다. 아마도 내가 아는 세상의 종교 중에 가장 근접한 세상물리를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설득력의 종교는 원효대사의 기실론소의 일심(一心)에서나 아니면 원불교의 공(空)의 원리일 것으로 이해되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신앙을 비롯한 하느님의 신비를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장 25절과 루카 10장 21절 참조)
그래서 부활신앙을 갖고 사는 신자들은 영원한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을 멈추지 않고 현재를 긍정적으로 행복하게 사는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뜻은 아마도 똑똑하다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우리가 초월적 삶을
추구하는 존재로의
의식 전환이 없이는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절체절명의
논쟁거리이다…
부활신앙을 갖고 사는
신자들은 영원한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을 멈추지 않고
현재를 긍정적으로
행복하게 사는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 같다.
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대리구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