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입하(立夏)다. 여름의 문턱이다. 온 산하가 샛푸르다. 땅에 뿌리박은 풀들이 질기다. 두꺼비 알이 깨어나고 개구리 알이 천지다. 사람들은 논밭을 갈아서 한 해 농사를 꾸린다. 볍씨를 불려서 싹을 틔운 뒤 모를 낼 것이다.
새봄에 하는 일이 다르지 않으나 해마다 돌아오는 봄은 다르다. 날이 좋아도 사람이 아프면 봄도 아프다. 사람이 좋고 날이 나쁘면 봄도 나쁘다. 날이 좋고 사람이 좋아야 봄이 좋다. 봄이 좋아야 풍년이다. 봄이 환해야 한 해가 환하다.
홍성담의 ‘사시사철-봄’은 1980년 오월의 봄이었다. 그 해 오월은 사람이 아팠다. 봄볕 아래서 사람들은 총칼에 휩쓸렸다. 지천에 까놓은 개구리 알은 풍성했으나 볍씨가 말랐다. 마른 볍씨로는 모를 낼 수 없었고 그 해 논밭에서는 흙바람만 나부꼈다.
‘사실사철-봄’은 홍섬담의 오월 목판화에서 단연 으뜸이다. 이 작품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읽어야 한다. 대지 깊은 곳에 태극이 있다. 선남선녀가 한데로 어울렸다. 한데로 어울린 그것이 씨알이다. 그것은 변함이 없다.
어머니 대지는 늘 그 씨알을 포태함으로써 대지를 깨운다. 태극을 품고 있는 어머니를 보라. 두 손 활짝 열고 하느님을 받는 저 숭고한 경이로움을 보라. 어머니 몸은 거대한 기운이다. 생의(生意:만물을 낳고자 하는 마음)의 활기가 불빛처럼 물빛처럼 부글거리는 그 속을 보라.
활활 거리며 끓고 있는 속 품이 위로 물밀 듯 올라가 대지를 깨웠다. 농부는 그 땅을 일군 뒤 씨를 뿌린다. 씨를 뿌리며 나아간다. 씨를 받은 땅은 온 마음으로 받아 싹을 틔울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범상치 않다. 대지의 저 숭고한 몸짓이 하늘을 우러르나 하늘이 기울었다. 기울어서 아프다. 아픈 결로 나아가는 저 사람,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물밀어 드는 봄은 언제나 새봄이다. 봄을 새봄으로 맞이하는 마음에서 만물이 싹튼다. 그 싹틈에 아버지 어머니의 숨결이 있다.
김종길 경기도미술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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