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왔나.” 자유여행일정을 함께 하던 중년부부가 서둘러 한 시간 만에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아내가 말했다. 그렇게 사전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도착한 곳이 오카야마 현의 구라시키시(倉敷美觀地區)였다. 그러나 거의 하루 종일을 구라시키에서 보내고도 발길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무엇이 우리를 붙잡은 것일까. 일본최초의 사립 서양 미술관이라는 오하라 미술관, 방적 공장을 재개발하여 호텔과 도예공방으로 만든 아이비 스퀘어, 에도시대의 사무라이 흔적이 남아 있는 거리 경관 등. 안내서를 보니 미관지구에 3개의 미술관을 포함하여 12개의 관람시설, 94개의 특색 있는 음식점, 지역의 전통을 파는 84개의 상점, 그리고 21개의 호텔 등이 있었다.
전쟁과 천재지변을 겪지 않은 채 번영했던 일본 지방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복원되어 있었다. 돌아보고 나서야 왜 일본인들이 ‘일본 제일의 상점거리경관’으로 선정했던가를 알 수 있었다.
역전을 나서면 구라시키의 재래시장을 지나야 한다. 특이한 것은 우리처럼 개조한 시장의 천정에 구라시키의 명소들이 새겨진 천들이 걸려 있다. 시장과 문화유산들이 공존공생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시장·문화유산 공존하는 日마을
도자기, 지역토속주, 그리고 카펫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상점들도 즐비하다. 전통 일식은 물론 콩 전문집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맛 집도 많다. 독특한 상점과 음식점을 보면서 차이나타운에 ‘다양성은 없고, 비슷한 자장면 집만 계속 늘어난다’고 걱정하던 풍미 사장님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구라시키 미관지구의 힘은 오하라미술관에 있었다. 3천500점의 예술품을 소장한 오하라미술관은 1590년경 엘 그레코가 그렸다는 수태고지(Annunciation)를 명작 1번에 등재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는 수태고지는 사업가였던 오하라(大原孫三郞)의 친구이자 천재화가였던 고지마 토라지오가 유럽에서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벨기에의 화가 레온 프레드릭의 대작이었다. 제목도 범상치 않다. ‘모든 것은 죽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신의 사랑은 모든 것을 소생시킨다.’ 1893년에 시작하여, 25년 만에 완성했다는 161×1100㎝ 짜리 대작이다. 7폭으로 이루어진 작품에는 처참한 죽음, 지옥의 불길, 거대한 홍수와 빙하, 정의와 종교를 상징하는 천사, 풍요로운 대지와 무지개 사이에 자리한 예수가 그려져 있다.
인천형 문화지구의 롤모델 삼자
‘나의 사랑하는 딸 가브리엘에게’라는 헌사에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사랑하는 딸을 잃어버린 화가의 애절함이 담겨있다. 47세로 요절한 화가 고지마가 수집한 이 작품의 크기가 바로 오하라 미술관 본관의 크기를 결정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림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내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구라시키의 힘의 원천을 생각했다. 사업가 오하라가 아니라 미술관 오하라로 자리잡은 그의 정신도 생각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과 노력들이 지방소도시 구라시키에 살아 있었던 것이다.
넘쳐나는 관광객을 보면서 생각했다. 인천에 적용할 수는 없을까. 조건이 가장 유사한 지역이 인천의 중구 일대와 청량산 일대가 아닐까 싶었다. 중구 주변에는 근대문화유산과 자유공원, 신포시장과 아트플랫폼 그리고 차이나타운이 있다.
청량산 일대에는 송암 미술관과 옥련시장, 시립박물관과 가천박물관, 영일 정씨 제실과 흥륜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예술과 관광, 문화와 상업을 연계하여 인천형 문화미관지구를 탄생시킬 수 있는 곳들이다.
권하고 싶다. 해당 구청의 공무원과 활동가들, 그리고 전통시장의 상인들이 함께 구라시키 시를 방문해 보시기를. 정답은 아니어도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민배 인천발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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