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과 사람, 京畿를 세우다] 23.혜소대사의 덕과 꺽정이의 기운이 깃든 칠현산

천년고찰 칠장사 품은 칠현산, 풍성한 역사와 전설 간직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646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칠현산 칠장사는 혜소국사가 일곱 도적을 감화시켜 수도승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는 사찰이다. 일곱 사람의 힘센 장정이라는 뜻의 ‘칠장’이 되었고, 일곱 사람의 어진 사람이 나왔다고 해서 산 이름도 칠현산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안성장은 서울의 시장보다 더 커서 그 물건이 한두 가지는 꼭 많았다”고 하였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안성은 경기도와 호서지방 해협 사이에 위치하여 화물이 수용되고 공인과 상인이 모여들어 한남의 도회가 되었다.”고 하였다. 교통의 요지이자 물류의 집산지였던 안성은 대구와 전주장과 더불어 ‘조선 3대 장’으로 꼽혔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 의 주인공 허생이 장안의 제일 부자인 변부자에게 돈 1만 냥을 빌려 삼남에서 올라오는 과일을 매점매석하여 큰돈을 번 곳이기도 하다.

칠장사 일주문 코앞이 버스 종점이자 주차장이다. 차를 세우고 어디서 시작할까 잠시 궁리했다. 칠장사부터 구경하기로 했다. 사천왕이 지키는 대문을 통과해 경내에 들어서니 공사가 한창이다. 왼편 건물은 지붕 기와까지 몽땅 들어낸 것을 보니 대공사였다. 단청이 퇴색했지만, 대웅전은 위엄과 품위를 잃지 않았다.

명부전 벽면을 채운 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말을 타는 모습, 칠장사를 중흥시킨 혜소대사가 일곱 도둑을 교화하는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임꺽정[林巨正]과 그의 형제들이 스승 병해대사의 좌우편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사찰 벽에 도둑을 그려 놓은 곳은 이곳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최근에 그려진 것이긴 해도 칠장사의 내력과 전설을 두루 담고 있기에 흥미로웠다. 꼭 오래된 것이라야 좋은 것인가. 격이 있다면 새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보물 488호로 지정된 혜소국사비는 고려 문종 14년(1060)에 왕명을 받은 조의대부상서 김현이 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오랜 세월 풍화를 겪은 탓에 마모된 글자가 많다.

안성에서 태어난 스님의 법명은 정현(鼎賢)이고 속성은 이씨였다. 열 살에 출가하여 광교사 충회대사에게 투신하였다. 칠장사 융철스님에게 배우며 이 절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여러 사찰을 옮겨 다니며 수도하다가 말년에 칠장사로 돌아왔다. 대사는 출가하여 승려생활 한지 74년이 되던 83세에 입적했다. 입적하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가르쳤다.

“인생이란 비유해 보면 번개와 밤바람 별빛과 새벽 같으니 내 이제 다시 무물(無物)로 돌아가려 하노니 너희는 감히 서로 헐뜯고 서로 상하게 하지 마라”

가부좌를 하신 채 입적하였는데 안색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공사 때문인지 임꺽정이 스승 병해대사를 기리기 위해 조성했다는 목불은 보지 못했다. 사실 ‘꺽정불’로 알려진 불상에 관한 내력을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다. 임꺽정이 활동했던 명종대 이후 선조, 광해군, 효종은 물론 정조까지 그의 이름을 역적으로 거론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곳은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피해 한동안 숨어 지내던 곳인데 조선왕조에서 역적의 대명사로 불린 임꺽정이 만들었다는 불상을 모셔 놓았다는 것은 의문이다. 관의 핍박과 양반사대부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승려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도 불상을 그냥 두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해대사의 대척점에 보우대사가 있다. 보우는 문정왕후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아 경복궁에 거처할 정도였다. 반면 병해대사는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였으나 당대 최고의 학자 조광조와 지기였으며, 말년에 칠장사에서 불경을 읽으며 생불 대접을 받았다.

벽초 홍명희가 1933년에 《임꺽정전》을 발표하면서 임꺽정의 이름은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벽초 이전에도 임꺽정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었다. 성호 이익은 임꺽정과 홍길동과 장길산을 조선의 삼대 도둑으로 꼽았다.《실록》에 홍길동은 10번, 장길산은 3번 이름이 등장하는 데 비해 임꺽정은 무려 25번이나 등장하고 있다. 벽초는 《삼천리》(1933년 9월)에 이런 고백을 실었다.

“임꺽정(林巨正)의 사기(史紀)는 극히 단편 단편으로 떨어져 있는 것밖에 없어서 대개는 나의 복안(腹案)으로 사건을 꾸미어서 나갑니다. 다만,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에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지요. 그것은 …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어 입지 않고 순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물론 벽초의 목표는 대성공이었다. 그의 소설은 조선의 풍속과 조선인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손꼽힌다. 또한, 80년이 지난 오늘날 읽어도 여전히 흥미롭고 가슴을 뛰게 하는 매력이 있다.

임꺽정은 토포사 남치근에게 체포되었다. 명종 17년(1562) 1월 13일자《실록》을 보면, 이때 사로잡힌 율이(栗伊)라는 도둑이 ‘서림이 다시 임꺽정과 몰래 통했다’고 하여, 의금부가 서림을 잡아 심문할 것을 청하자 대신들이 서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의논하고 있다. 《기재잡기》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실려 있다. 임꺽정이 잡혔을 때 “말하기를 ‘내가 이런 계획(강조)을 한 것은 다 서림 때문이다. 서림아, 서림아, 참으로 마침내 귀순한 것이냐’ 하였으니, 이는 서림이 투항한 것을 분하게 여겨 죽음을 받게 하고자 해서 한 말”이라고 하였다.

《실록》에 임꺽정 체포를 위한 대신들의 의논을 소개하고서 ‘사신은 논한다’라는 평을 붙였다. 사관의 붓이 매섭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한이 없어서 수령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세가를 섬기고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겠는가.

칠현산을 오르려고 다시 명적암으로 이동했다. 들머리에 세워진 이정표에 따르면 두 시간도 걸리지 않을 단거리였다. 길이 짧으니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자 가을 풀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금방 무성한 참나무 숲에 하늘이 가려졌다. 키 큰 참나무 아래로 단풍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쉬엄쉬엄 걸었는데도 벌써 정상이다. 반가운 풍경이 눈에 들었다. 돌탑 두 개가 오누이처럼 정답게 서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작은 비석에 516.2미터라고 새겨져 있다.

정상에 올라 칠장사를 품은 골짜기를 굽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울창한 나뭇잎에 가려 산봉우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 “후두두”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비도 챙기지 않았는데 낭패였다. 아침에도 확인했지만,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는 없었다. 신발끈을 단단히 묶었다. 칠장산을 향해 달리다 보니 비가 그쳤다.

칠장산으로 향하는 길도 산책로처럼 편안하고 호젓하다. 잔뜩 흐렸지만 칠장산(492.4미터)은 사방이 트여 있다. 정상에서 왔던 길로 되 내려와 ‘3정맥분기점’이라 새겨진 이정표 앞에 섰다. 금북정맥은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의 서북쪽을 지나는 산줄기의 이름으로 충남을 가로질러 예산의 가야산을 지나 태안반도의 안흥진으로 이어지며, 한남정맥은 도덕산과 함박산으로 이어지는 13정맥의 하나이다. 칠현산은 한남금북정맥의 끝나는 지점이지만 칠장산은 금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시작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칠장사로 내려가는 길은 운치가 있다. ‘조릿대’라 불리는 산죽(山竹)이 길옆에 무성하다. 한 10여 분쯤 걸었을까, 문득 나한전 옆에 우람하게 서 있는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나한전은 어사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갈 때 기도를 드렸더니 급제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칠현산은 후덕한 육산(肉山)이다. 미리내 성지가 있는 시궁산에도 지난 태풍에 뿌리가 뽑히고 허리가 부러진 나무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이 산에는 단 한 그루도 쓰러진 나무도 보지 못했다. 천년 고찰 칠장사를 품은 칠현산은 비록 높지는 않지만 풍성한 역사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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