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남자’서 ‘진보세력 맏형’으로…
1970년대 유신반대 투쟁 이끌다 투옥
노 前대통령 장례식 때 실질적 ‘상주’ 역할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문 후보는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실장을 거친 친노(친노무현) ‘핵심’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대선 전 부산 선대본부 출범식에서 언급했던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는 말이 대변하듯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였다.
인권변호사였던 그는 청와대 입성 후 ‘왕 수석’으로 통했으며, 항상 노무현 전 대통령 옆에 있었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상주역을 맡아 마지막 곁을 지켰으며 노무현 재단 이사장을 맡아 유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신반대로 구속…‘인권변호사의 길’ 선택
문 후보는 경남 거제 출신으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연탄배달을 하고, 때로는 성당의 식사배급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가난했다. 경남중·고를 거쳐 경희대 법학과에 진학, 대학 시절에는 ‘반유신’ 투쟁에 나선 운동권이었다.
그는 석방되기 무섭게 강제 징집돼 특전사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했다. 22회 사법시험(1980년) 합격 후 1982년 부산에서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계기로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이후 두 사람은 각종 시국 사건관련 변호를 맡으며 진보 개혁 성향의 변호사로 이름을 알렸다.
부산·경남 민변을 창립하고,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부산 NCC 인권위원을 맡았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약칭 부민협)를 창립하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부산 국본)를 만들어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문 후보는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한 6월 항쟁의 기억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고 저서 ‘운명’에서 술회했다. 노무현 변호사가 1988년 총선에서 당선되며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 이후에도 문 후보는 부산에 남아 시국·노동사건을 도맡았다.
그가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02년 대선부터다. 노무현 후보의 부산선대위 본부장을 맡으면서 극적 반전드라마에 힘을 보탰고, 참여정부 출범 후에는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직접 서거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브리핑을 했고, 국민장의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영결식까지 실질적 ‘상주’ 역할을 했다.
정치입문 승승장구…대선주자로 ‘우뚝’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혁신과 통합 상임대표를 지낸 그는 지난해 6월 자서전 격인 ‘운명’을 발간하며 본격적인 정치 행보의 서막을 알렸다. 저서 ‘운명’은 출간 1년여 만에 20만부 이상 판매되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올 초 방송된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소박하고 소탈한 모습이 대중들에게 전해지며 인지도와 지지율을 크게 끌어올렸다.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에 출마해 PK(부산·경남)지역 선거를 진두지휘했다.
이른바 ‘낙동강 벨트’인 이 지역에서 민주당이 3석을 얻는데 그치면서 승리를 이끌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왔지만, 반대로 새누리당 텃밭인 부산에서 평균 40%를 웃도는 득표율을 견인하며 대선 경쟁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지난 6월 17일 독립문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8월에는 자신의 정책 비전을 담은 ‘사람이 먼저다’를 출간했다. 8월 25일 제주를 시작으로 13개 지역에서 치러진 민주당 지역순회경선에서 단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으며 13연승 행진을 거듭, 결선투표 없이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글 _ 강해인·김재민 기자 hikang@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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