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극장안은 눈물바다가 된다. 특히 그 눈물을 줄줄 흘려대는 관객들이 다름아닌 40대 이상의 여성들이다. 이 영화는 요즘 취향의 쿨한 멜로가 아니라 60년대식의 요란한 울음을 연상케 한다. 다시 복고가 된 것이다. 늑대소년은 여성취향 멜로의 새로운 공식을 쓴다.
전통적으로 멜로에서 여자들은 항상 수동적이고 종속적이었다. 늑대소년에서 여자는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다. 발칙하고 능동적이며 심지어 남자에게 명령까지 한다. 여성멜로에서 여성이 중심이 되어 능동성을 보인 영화는 이 영화가 근래 들어 처음이다.
늑대소년의 주관람층이 20대를 넘어서 40~50대 여성까지 육박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여성관객층을 되찿아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년여성들에게 순정멜로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과거에 젖게 한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 중년여성들에게 어필한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배용준을 통해 묘사된 지고지순한 캐릭터는 패전이후 건실하게 살며 여자만을 위해 순정을 바쳤던 일본 남자들에 대한 향수가 배어 있다.
일본의 중년여성들은 일에 미쳐 경제 동물이 된 일본 남성들이 그런 순수함을잃어버렸다고 생각했고 90년대 이후 한국 드라마에서 그런 남성을 만난 후 넋이 빠져버린다. 비슷한 현상이 한국에서도 늑대소년의 캐릭터와 배우 송중기에게 일어났다. ‘하찌 이야기’ 라는 일본 영화를 보면 충성스런 개의 모습이 나온다. 개는 주인이 죽은 이후에도 버스역에 나가 죽어 더 이상 오지 않는 주인을 종일 기다리고 그 모습에 많은 관객이 눈시울을 적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내 남편도, 내 아내도, 내 친구도 저랬으면 하는 순정의 마음으로 흐느껴 울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이고 그 외로움은 아무도 대신하지 못한다. 인간이 피곤한 것은 자신을 위로해줄 단 한사람이 이 세상에 거의 없기 때문이다.
순정멜로가 성공하는 지점은 그곳에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남성보다 여성의 위로가 더 시급하다. 남자는 직장에서만 치이지만 여성들은 직장과 가정 양쪽에서 시달리니 얼마나 피곤하겠나. 반면 여성을 위로할 영화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 남성들이 쓸데없이 힘을 과시하는 영화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역대 최고 흥행영화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라는 점도 그런 면에서 시사적이다. 스칼렛 오하라, 바로 절망을 극복하는 사랑스럽고도 처절한 여성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늑대소년이 애무한 부분은 바로 그곳이다. 명령하는 여성, 그 명령을 따르는 충직한 남성. 그 둘은 상사-부하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목숨마저 내놓고 순수한 애정을 나눈다. ‘써니’ 이후로 중년 여성들은 영화관 출입이 즐거워졌다. 공감할 대상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도둑들’에서도 중년 여성들이 공감할만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김해숙이 열연한 캐릭터이다. 홍콩의 중년 도둑과 사랑에 빠져 목숨을 거는 열정의 순간을 보여준다. 그건 그녀에게 있어 마지막 사랑이다. 여성관객들은 그 마지막 사랑의 장면에 열광한다. 중년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인가. 돈, 명예 다 필요없다. 온 마음 다 바친 불같은 사랑이다.
현실에서 그런 사랑은 오지않는다. 순정멜로는 그지점에서 여성관객과 터놓고 공감한다. 영화를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는 욕망 충족이라 정의한다면 현대 사회가 순정을 억압한채 달려간다는 차가운 현실을 읽어내게 한다. 늑대소년이 주는 교훈은 그것이다.
어른이 되도 늙지 않는 젊음. 그게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순수함이란 영화에서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부문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그걸 잃어버린 어른은 가장 불행한 어른이고 말이다.
정 재 형 동국대 영화학과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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