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호의 보물읽기]만안교

만안교는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행렬의 편의를 위해 축조한 다리이다. 정조의 화산 행차는 원래 용산에서 배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너고 노량진과 동작을 거쳐 과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에는 다리가 많고 남태령이라는 고갯길이 있어서 행차에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과천에는 영조를 부추켜서 부친인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김상노(金尙魯)의 형인 김약로(金若魯)의 묘를 지나게 되므로 정조가 이를 불쾌하게 여겨 시흥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로 바꾸면서 이곳 안양천을 지나게 되었다.

안양천에는 원래 다리가 없어서 왕의 행차시에는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왕의 행차가 있은 뒤에는 바로 철거하는 것이 상례였다. 시흥로가 개설된 것은 정조 18년으로 첫해에는 이처럼 임시로 나무다리를 놓아 사용하였는데 다리를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과 평상시 다리가 없어 백성들의 불편해 하였으므로 항구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 경기관찰사 서유방(徐有防)에게 명하여 3개월의 공역 끝에 만안교를 완성하게 되었다. 만안(萬安)이란 의미는 ‘만년동안 백성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다리’라는 뜻으로 정조가 직접 작명하였다.

다리의 규모는 원래 길이 15장(약 30m), 폭 4장(약 8m), 높이 3장(약 6m)이고 홍예수문(虹?水門 : 무지개처럼 둥근 수문)이 5개라 하였는데, 현재는 홍예가 7개인 것으로 보아 시공 당시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예는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써서 반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는 장대석을 깔아 노면을 형성하였다.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되며, 만안교 처럼 홍예가 7개인 다리는 만안교가 유일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안교는 원래 현재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약 200여m 떨어진 만안로 입구에 있었는데 1980년 국도 확장 때 이곳으로 옮겨 복원되었다. 다리 앞에는 서유방이 글을 짓고, 당시 명필이었던 조윤형(曺允亨)이 글씨를 쓴 만안교비가 있어 이 다리의 연혁을 설명해주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매년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만안교 다리밟기 놀이가 펼쳐지고 있어 정조가 이 다리를 축조한 뜻을 계승하고 있다.

장덕호 경기도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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