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하는 에듀 클래스]<18>미적 교육의 시선으로 바라 본 두 개의 수업

"좋은 교육은… 아름다운 한편의 예술"

■미적 교육의 등장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나 대자연의 경이로운 풍경을 만나고 나면, 한동안 그 만남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힘이 생긴다.

어떤 드높은 질서 안에서 대상과의 합일하는 경험은 현실의 부족함, 불만, 불안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북돋는다. 사람 없는 석굴암 앞에서, 해가 넘어가는 지리산 등성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 앞에서, ‘가을은 올 시간보다 가버린 시간이 더크다’는 고은 선생의 시 구절을 읽다가, 주위의 방해를 받지 않는 무관심한 관조의 상태에서 문득 세상의 비밀스런 질서에 맞닿은 듯한 이러한 경험들은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존듀이의 말처럼 “인간과 환경 간의 불균형을 조화로 이행하는 순간이며 가장 강렬하게 살아있는 순간”, 즉 ‘미적경험’의 순간인 것이다.

미적경험은 대상에 대한 무관심한 관조로부터 일어날 뿐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존재와 최초의 목적마저 사라져버리는 활동의 몰입 과정에서도 생겨난다.

무대 위 배우들이 극중 역할에 자신의 온 존재를 투사해버린 순간, 파란색의 특정한 감각적 물성을 드러내기 위해 갖은 재료와 터치로 실험하는 화가의 작업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의 무너진 마음을 전하고자 감정을 고양하는 가수의 노래에서도, 서로 다른 악기가 제 때에 제 소리로 어울리며 화음이 되는 순간에도 미적경험은 일어난다. 이렇게 자신의 노동이나 활동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넘어서는 순간의 경험이 자아내는 행복과 환희를 맛본 이들은 그러한 경험을 일상에서도 지속시키고자 노력하게 되며, 그리하여 자신과 자신의 주위를 미적으로 가꾸는 것으로부터 세상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관조와 몰입이 미적인 것은 아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떠나온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난 배를 협동으로 지켜가는 선원들의 생명을 건 몰입노동이, 출근 길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보다 문득 세상의 무의미함에 닿아버린 중년의 회한이, 게임 속 가상의 세계에 빠져 괴물들과 결투를 벌이는 청소년들의 잠 못 이루는 몰입의 밤이나 온갖 근심과 갈등마저 사라져 버리는 속도의 한계까지 내달리는 라이더의 몰아의 주행이 자아내는 경험들은 미적경험으로서의 관조와 몰입에 비견될 만한 경험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경제적 토대, 생명의 토대가 완전히 무너져버릴 수 있는 이러한 관조와 몰입의 경험들이 반복되는 삶이란 얼마나 위험하고 불행할지 잘 알고 있고 이를 미적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바로 여기에 예술을 통한 미적경험, 그리하여 미적으로 고양된 인격을 형성하며 삶을 변화시켜가는 존재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교육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경험의 과정, 즉 문화예술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쉴러는 일찍이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이 이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현실의 제약을 무너뜨려야만 하는데, 현실을 무너뜨리면 이상으로 나아갈 토대가 없어지는 삶의 부조리함을 넘어서기 위해 ‘미적교육’이 이뤄져야 함을 그의 저서 ‘미적교육에 관한 편지’를 통해 주장했다.

“인간은 물질의 한계 안에서 물질에 대항하는 싸움을 놀이해야 합니다. 이는 자유의 성스러운 땅에서 이 두려운 적과 싸우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이지요. 인간은 더욱 고귀하게 욕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숭고하게 의지하는 것이 꼭 필요하지 않도록 말이지요. 이런 일은 미적은 문화(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미적인 문화(교육)은 자연법칙도 이성법칙도 인간의 자의를 묶어버리지 못한 그 모든 인간 행동의 영역을 아름다움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미적교육은 외적인 삶에 부여한 형식에서 내적인 삶의 길을 열어 놓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만드는 작품 같은 미술수업 : 김월식 샘과 함께 한 흥덕고등학교 ‘아방과후르드’

‘미적으로 완성되지 않았다면, 어떤 경험도 완전할 수 없다. 그것은 감각, 분위기, 본원적 생명력, 그리고 생동성의 종합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존듀이의 또 다른 아포리즘은 흥덕고등학교 방과후 활동으로 진행되고 있는 미술수업을 적확하게 지시한다. 우리 안에 만연한 일상의 폭력성을 예술을 통해 다스리는 힘을 기른다는 목적을 가진 이 수업에는 1학년 14명 2학년 6명, 총20명의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선택 참여하고 있다. 자율수업이어서인지 이미 한 차례 진행된 지난 수업의 저조한 참석률 때문에 김월식 샘과 흥덕고등학교 담당교사의 걱정이 수업 전에 있었다.

이윽고 수업시작 종이 울리고 지난 번 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12명이 교실로 들어선다. 서로 다른 학년과 반에서 왔고, 지난 한 차례 수업만으로는 아직 관계형성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 서로 대면대면 서먹서먹하다. 아이들이 자리에 앉자 김샘이 묻는다. “사진 찍기 싫은 사람?” 두 명이 싫다고 하자, 사진찍는 이에게 김샘은 그 두 명은 찍지 말라고 한다. 또 김샘은 묻는다. “우리가 이 수업을 왜 할까?” 아이들 대답이 없다. 재차 묻는다.

“그럼 삶이 중요할까? 예술이 중요할까?” 몇 명의 아이들이 대답을 한다. 김샘, 진지하게 듣고는 모두 중요한 이야기라고 공감을 한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말한다. “예술은 감성이 작동하는 딴 짓이야” 아이들, 자기들의 눈높이로 언어화된 김샘의 이야기에 약간의 반응이 생긴다. “그럼 감성적으로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아이들 아까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약”, “술”, “연애” 김샘, “그렇다 모두 감성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의 공통점은 감각을 열리도록 하는 것이라는 거다. ”가령 보는 것으로 설명하자면 흐릿한 정신으로 보는 것, 들뜬 마음으로 보는 것. 보는 것은 다양하다. 눈을 감고 볼 수도 있다. 안대를 쓰고 해볼까?” 김샘, 안대를 만들어 두 명의 학생에게 차례로 씌어 주면서 만지고 냄새 맡도록 하면서 그것을 이미지로 떠올려 보도록 한다. “만원버스 안에서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스킨향수 냄새를 맡게 된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것 역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감각으로 볼 수 있게 되려면 감성적이 되어야 한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감성적이 될 수 있을까?” “모두 둥글게 앉아 볼까요” 아이들 둥글게 앉자 김샘, 한동안 레크레이션 강사가 되어 몇 개의 게임을 쭉 돌린다. 웃고 떠들며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처음 서먹서먹했던 분위기가 말랑말랑해졌다.

김샘, “이제 다시 수업 형태로 앉아 볼까요” 수업테이블로 아이들이 모두 앉자, 여러 색깔로 그리기, 여러 속도로 그리기, 여러 모양으로 그리기, 공의 움직임을 그리기 등등. 김샘의 지도와 평, 그리고 상호평을 하면서 아이들 한 명 한 명 수업에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휴식시간 종이 울렸는데도 아이들 꼼짝않고 김샘의 수업에 몰입한다. 김샘 갑자기 종이비행기를 만들라고 말한다. 아이들 다 접고나면 김샘, “스케치 할 도구 들고 밖으로 나가자” 아이들과 다 함께 운동장으로 가서 비행기를 날리기 시작한다.

한동안 그렇게 놀다가 스탠드 쪽으로 가서 자리잡고는 몇 명의 친구들이 차례로 자신이 접은 비행기를 날리면 그 궤적을 나머지 아이들이 그리도록 한다. 비행기 궤적의 그림이 추상미술의 한 형태로 아이들마다 다르게 드러난다. 그것에 대해 ‘뉴욕스타일’, ‘모스크바스타일’ 등등으로 농과 평을 하면서 김샘 추상미술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아이들에게 알려준다. 이제 수업분위기는 무엇이든 김샘이 던지는 대로 아이들이 받아낼 것만 같이 말랑말랑해졌다. 다시 교실로 돌아와 두 명씩 짝을 짓고 서로의 싸인 따라 그리기를 한다. 그리고 바꿔보고 평하면서 ‘관찰’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해 준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의 회고를 나누고, 다 함께 김샘이 가지고 온 간식을 나눠먹으며 남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수업이 끝난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김샘은 아이들의 질문과 대답 하나 하나에 바로 반응하면서 질문하는 아이나 대답하는 아이, 그것을 지켜보는 아이 한 명 한 명이 수업에서 벗어나있지 않도록 하였고, 그것이 비록 수업과 관련없어 보이는 이야기일지라도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수업과 연결시켜 갔다.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은 끝난 것이 아쉬워 보였고, 마치 열렬한 관객들의 호응을 받으며 공연무대를 내려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배우마냥 기쁨과 회한이 넘치는 듯 했다.

단언컨대 김월식 샘의 미술수업에 참여한 아이들은 현실에 발 디딘 놀이를 하면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이어지는 표현들이 완성되는 미적 경험을 했다. 이 경험들은 이번 수업 참가자들의 몸에 기억되어 오래도록 일상의 부족함을 채우거나 불만을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질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안의 폭력성뿐 아니라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을 스스로 치유해갈 것이라 확신한다.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도 자신의 현실을 무너뜨리지 않고도 수업 안에서 가능한 살아있는 경험, 미적경험, 미적교육인 것이다.

“경험이 되는 내용이 완성에 다다를 때 우리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럴 때 그것은 내면적으로 완성되고, 경험 전체의 흐름 속에서 다른 경험과 구별된다. 한 작품이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완결되고,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고, 게임이 진행된다. 식사를 하거나, 체스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글을 쓰거나, 혹은 정치적인 캠페인에 참여하는 등의 상황은 하나의 정지가 아니라 하나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의 전체이며, 나름의 개별적인 특성과 자기 충족성을 지닌다. 이것이 경험인 것이다.”(존듀이)

▲몸과 맘이 아픈 아이들의 통합예술수업 : 부천문화재단 ‘몸놀이 맘놀이’

인간의 본성은 육체, 영혼, 정신으로 구성되며 자유를 향하는 초월적 본성으로서의 자아의 형성이 교육의 목표임을 주장한 루돌프 슈타이너의 사상은 쉴러의 미적교육의 원리, 즉 육체에 근거한 ‘감각충동(der sinnliche Trieb)과 정신에 근거한 형식충동(der Formtrieb), 그리고 이를 잇고 결합하는 유희충동(der Spieltrieb)의 구조와 거의 흡사하다.

슈타이너는 육체는 의지에, 영혼은 감정, 그리고 정신은 사고에 각각 관여되는데 감정은 육체가 정신과 연결되는 중요한 매개이며, 이는 대개 8세에서 14세에 이르는 교육은 조화와 균형의 예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부천문화재단이 경제적으로 가난한 지역인 오정구에서 진행하는 토요문화예술 프로그램 <몸놀이 맘놀이> 는 어떤 이유에서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몸과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예술적 놀이를 통해 발달을 방해하는 장애요인을 아이들 스스로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되고 운영된다고 볼 수 있다.

4월부터 4명의 전공이 조금씩 다른 강사가 4~6주 정도로 돌아가면서 놀이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다독이고 가꾸고 쓰면서 스스로와 커뮤니티를 생동해 간다는 원리로 기획되어 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정구아트센터에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에는 열다섯 명 정도의 아이들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지적장애를 겪고 있는 아이와 과잉행동을 보이는 아이를 비롯한 경계선에 있는 몇 명의 아이들, 그리고 소위 정상범위에 있다고는 하지만 사소한 대화도 얼마간의 폭력성을 동반하는 것이 문화로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그램이 시작된 5개월 전에는 이보다 훨씬 심했는데,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이나마 조용해지고 서로 배려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담당하는 재단의 담당 코디네이터 변자영 샘은 전한다.

방문한 날 진행된 프로그램은 연극놀이었는데 몸조각놀이가 먼저 시작됐다. 아이들은 교사의 지도에 따라 파트너가 된 아이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조각을 만들려 하지만, 산만하거나 조각이 된 아이가 쑥스러워하면서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특히나 누군가의 몸을 만지거나 건드리는 행위가 익숙하지 않은 듯 조각가가 된 아이는 대상에 대한 애정없이 도구적으로, 심지어는 폭력적으로 상대의 몸을 다루었다. 수업을 잠시 멈추고 자신과 상대의 몸에 대해 어떤 감각을 가져야 하는지 이야기를 길게 나눠봐야 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담당 교사는 아이들의 빠른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고, 천천히 속도대로 해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한다. 이어서 돌돌 만 신문지를 자신의 상상에 따라 망원경, 지팡이 등으로 이용하는 걸 연기해 보는 놀이가 진행되었다.

몸조각놀이와 마찬가지로 하고 싶을 때 스스로 나와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에 의해 지목된 아이가 하기 싫거나 쑥스러워 하며 나와서는 건성으로 신문지를 이용해 연기를 하고는 재빠르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그 사이사이에도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는 내키는대로 수업의 흐름을 바꿔놓았으며, 2~3명 짝을 지어 있던 아이들은 툭탁거리며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느라 시연하는 아이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이런 그루핑으로는 교사들이 너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몇 주간의 프로그램 운영으로 관계형성이 되었던 이전 몇 명의 강사들이 이미 거쳐간 터라 아이들은 새로 프로그램을 시작한 교사와의 수업 성공적 운영을 위한 협력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듯 했다. 이처럼 여러 명의 전문강사에게 의존하는 프로그램의 경우, 아이들의 생활을 돌보며 일상으로 관계맺는 담임 혹은 담임형 교사가 반드시 수업을 통제 혹은 개입할 수 있어야 원활히 진행될 수 있겠다 싶다. 그리고 “교육은 예술”이며 교사는 “예술가”여야 한다는 ‘교육예술’을 주창한 슈타이너 선생의 개념을 한 번 더 빌려 말하자면 육체, 에테르체(생명에너지를 전달하는 매개체), 아스트랄체(감각,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 그리고 자아가 어떤 이유에 의해서 고르게 발달하지 않고 있는 아이들의 경우 한 명 한 명의 상태를 들여다보면서 거기에 걸맞도록 교사가 먼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좋은 교육은 준비된 교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교육자의 에테르체(생명체)는 어린이의 육체에 유효한 작용을 미칠 수 있는 상태여야 합니다. 교육자 자신의 아스트랄체(감정체)는 어린이의 에테르체에, 자아는 어린이의 아스트랄체에 유효한 작용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교육자로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라는 것입니다”

글 강원재 OO은 대학연구소 1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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