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우는 역사는 싫어! 예술로 만나는 역사에 푹 빠졌네
과연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대 위 주인공들은 바로 지난 4월부터 ‘예술로 배우는 인류 원(原)문명’ 수업에 참가했던 4~6학년 20명의 학생들. 8개월 동안의 수업이 막을 내리는 지난 8일 오전 서수원주민편익시설 희망샘도서관에서 그들을 만났다.
■인류 문명 예술과 만나다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문명, 인더스문명.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빨간 펜으로 교과서에 밑줄 그으며 무작정 외우고 시험 봤던 기억 때문은 아닐지.
하지만 ‘예술로 배우는 인류 원(原)문명’ 수업은 다르다. 굳이 애써 암기하지 않아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가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
강사의 설명과 함께 당시의 놀이, 문자, 경전 등을 문학, 미술, 음악, 연극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 수업이 열리는 교실에는 책상도, 의자도 없다.
고대 그 시절 그때처럼 바닥에 앉아 자유롭게 선생님이 들려주는 메소포타미아의 수학, 이집트의 사회조직, 대홍수와 마누의 물고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다.
필기 시간도, 시험도 당연히 없다. 대신 배운 내용을 몸소 체험한다.
당시 사람들이 흙을 자주 이용했다는 특징을 살려 옹기토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어 족적을 남기고, 인도 우화 ‘생쥐와 상인’을 듣고 직접 바느질을 하며 작은 생쥐를 만든다.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고대 신들은 연극을 통해 만나보고 신의 특징과 당시 시대상을 경험한다.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1시까지 이어지는 수업시간에 간식 시간도 빠질 수 없는데 메뉴 역시 색다르다.
그날 배운 수업과 관련 있는 간식으로 아이들이 그날 배운 내용을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인류는 알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첫 수업 시간엔 달걀을, 이집트 문명 당시엔 그들이 즐겨 먹었던 빵과 포도 주스를 먹는다.
이 연관성을 눈치 챈 아이들이 매번 오늘은 무슨 공부를 하고 어떤 간식을 먹을지에 대해 궁금해하며 수수께끼를 맞추듯 서로 다른 답을 쏟아냈다는 후문이다.
한동균(11ㆍ호매실초4)군은 “책으로 읽을 때는 어려운 게 많았다. 여기서는 시험도 안 보고 놀면서 배워서 좋다”며 “인도문자를 해석하면 노벨상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인더스문명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며 웃었다.
지난 4월7일 시작한 문명 수업도 끝이 났다. 그동안 배웠던 내용과 작품을 아빠, 엄마에게 보여주는 ‘인더스 문명체험 매듭잔치’날.
한 문명이 끝날 때마다 부모님을 초청해서 보여주는 실연형 수업 방식으로 앞서 지난 7월과 9월에도 각각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 문명에 대해 선보인 바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체험 매듭잔치에서는 처음인지라 긴장을 많이 해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고.
하지만 세 번째로 진행된 이날 발표회에서는 사회부터 순서 안배까지 모두 아이들이 맡아서 진행했다.
마이크를 들고 장난치고, 친구들과 떠들던 아이들이 리허설이 시작되자 의젓한 모습으로 변신했다. 마치 부모님들이 와있는 것처럼 진지하게 연습에 임했다.
사회자인 제갈진(12ㆍ영통초5)양의 지휘 아래 순서를 익히고 잘못된 부분은 바로 잡았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만들어왔던 왔던 작품을 이름표와 함께 전시했다.
어느 정도 발표회 준비를 마쳤을 때 카메라를 든 학부모들이 하나둘씩 강당에 들어와 작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침내 “나마스떼” 인도식 인사로 발표회 막을 올린 아이들은 걸으면서 명상하고 다 함께 ‘동방의 불빛’이라는 시를 낭송했다.
이어 아이들이 인도의 종교, 카스트제도, 힌두교와 윤회, 암베르까르, 인도의 신 등 주제별로 일어나 발표했다.
자신이 맡은 주제에 대해 아이들은 술술 풀어나갔고, 이를 지켜보던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의 모습에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물론 100% 성공은 아니었다.
이날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아이들의 발표가 끝난 뒤 마련된 ‘부모님과 학생들이 함께하는 소감나누기’ 시간이다.
다과를 나눠 먹으며 학부모와 아이들이 자기가 만든 작품들을 설명해주고 무대 위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진풍경이었다.
아이들의 어깨는 으쓱해지고 부모들은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뿌듯함을 감출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제양은 “친구들과 놀 수 있는 토요일에 수업에 참가해서 싫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토요일이 기다려진다”며 “오늘 마지막 수업이라 아쉽지만 내가 직접 사회를 보고 아빠, 엄마에게 우리가 배운 것들을 보여줄 수 있어서 기분이 최고”라고 말했다.
조영효군 어머니 이미정(42)씨는 “우리 아이가 원래 내성적이었는데 수업에 참가한 이후에 발표력이 좋아졌다”며 “문명을 배우는 동시에 성격까지 외향적으로 바뀌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만족감을 내비쳤다.
스마트폰, 컴퓨터 게임, 텔레비전에 빠져있는 아이들을 이처럼 고대 문명에 푹 빠지게 한 이가 있으니 10여년째 ‘예술로 배우는 인류 원(原)문명’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손채수 교육예술연구소 초암 소장이다.
이 수업은 본래 영재교육프로그램으로 진행됐었지만 손 소장은 올해 경기문화재단 토요문화학교 차오름 프로그램에 지원해 일반 아이들에게도 강의형, 체험형, 실연형으로 구성된 해당 수업을 진행했다.
고대문명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알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려주고 싶었던 것.
이에 따라 수업에서는 인간의 발달이 한순간에 이뤄진 게 아니라는 것을 방증하기 위해 고대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과정을 하나하나 짚어준다.
고대인의 삶을 통해 아이들이 지혜롭고 재치있게 삶을 살아가고 공존하는 세상을 만드는 방법도 제시한다.
손채주 강사는 “‘온전한 교육’이라는 교육 철학 아래 고대 사람들이 지금에 비해 낮은 문명에 살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며 “문명의 바퀴가 천천히 돌며 인류를 발전시킨 역사를 공부가 아닌 예술로서 아이들이 느낄 수 있게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 수업은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에 몰입하고 손으로 직접 작업을 하며 내용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것이 중심”이라고 덧붙였다.
사진=추상철기자 scchoo@kyeonggi.com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