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원에서 놀자]<25>여주문화원 '명성황후 숭모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의 탄신을 기리다

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시대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행보를 보여준 왕비였다. 열여섯 살 소녀 민자영이 조선의 왕비가 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결국 일본인들에게 비참하게 시해되기까지의 일대기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통한의 역사 속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명성황후를 통해 조선 말의 혼란했던 역사적 상황과 대한민국 근대사의 아픔을 엿볼 수 있어 그녀는 아직도 각종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 그리고 책 등 다양한 장르의 주인공으로 사랑받고 있다.

명성황후의 고향, 경기도 여주에선 그녀를 ‘비극적인 국모’가 아닌 ‘대한민국 여장부’로서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자 2012년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치렀다.

■영리하고 재기발랄했던 소녀, 조선의 국모가 되다

명성황후는 여흥 민씨로 1851년(철종2) 음력 9월 25일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지금의 여주읍 능현리 250-2)에서 태어났다.

8살에 아버지 민치록을 여읜 이후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함께 여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운현궁 앞 여흥 민씨 종가 내 감고당에 머물렀다. 조선시대에 대를 이을 사내아이가 없는 집안은 이미 몰락을 예정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12촌인 민승호가 양자로 들어와 집안의 제사를 맡기는 했지만, 사실상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단둘이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다. 명성황후는 어린 시절, 영리하고 재기발랄 함으로 인해 인근의 칭찬이 높았다.

그때 당시 철종이 창덕궁에서 승하하고 닷새 뒤 흥선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9)의 둘째아들 명복이 조선 제26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이가 곧 고종이다. 흥선군은 실권을 장악하고 고종의 왕비 책립문제를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총명하기는하나 주변에 힘이 되어줄 사람이 없어 자신의 집권에 방해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명성황후를 조선의 국모로 삼았다.

1866년(고종3) 3월 7일 민치록의 딸 명성황후를 고종의 왕비로 맞아들인다는 조칙이 반포되었고, 3월 9일 납채례(納采禮ㆍ청혼서를 보내는 의례), 3월 11일 납징례(納徵禮ㆍ혼수를 보내는 의례), 3월 17일 고기례(告期禮ㆍ신부 집에 혼인 날짜를 알리는 의례 ), 3월 20일 책비례(冊妃禮ㆍ왕비를 책봉하는 의례)에 이어 21일 별궁에서 친영례(親迎禮ㆍ신랑이 신부집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의식), 22일 인정전에서 문무백관의 하례속에 상견례(相見禮)가 거행됐다.

이때 명성황후 나이 만 14세 6월, 비운의 명성황후의 국모로서의 삶은 이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비극…명성황후 시해사건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명성황후는 삶은 녹록지 않았다. 남편 고종에겐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고 시아버지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명성황후는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았지만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명성황후와 대원군은 며느리와 시아버지이기 전에 조선의 독립과 부국강병을 누구보다 갈망했다. 대원군은 쇄국정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 보수세력에 의한 부국강병을 추구하려 했다. 반면 명성황후는 친일본으로 대표되던 개혁세력을 바탕으로 근대화를 시도했다. 그래서 정치적 갈등이 심했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는 난입해 들어온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당했다. 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이 을미사변을 지휘한 것은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였다.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였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왕비 살해의 원한을 갚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시아버지였던 대원군은 이 틈에 잠시 정권을 되찾는 듯했지만, 고종이 이미 아버지마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 공관에 안전을 의탁하는 아관파천을 행함으로써 곧 실각했다.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국격을 훼손당하고 망국으로 가는 길을 한발 더 내딛게 됐다.

명성황후는 시해 직후 대원군에 의해 폐위돼 서인으로 강등됐다가 같은 해 고종에 의해 복호됐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황후로 추봉됐다. 장례는 죽은 지 2년 만인 1897년에 가서야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홍릉에 안장됐다.

■ 탄신 제161주년 기념 ‘명성황후 숭모제’ 거행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살해 직후부터 지금까지도 엇갈린다. 그녀가 망국의 왕비로서 나라를 망치게 한 장본인이라는 평가부터 구국을 위해 몸을 바친 시대의 여걸이었다는 평가까지 극단적이고 다양하다. 이것은 아마도 19세기 말 시대적 혼란 상황 속에서 그녀가 보여준 정국운영의 다양한 면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조차도 그녀를 ‘동양의 호걸’, ‘여장부’로 평가했다. 명성황후는 총명하고 정치에 적극적이었고, 시대를 앞선 매우 현대적인 자존감을 가진 여인이었다. 이러한 점을 높이 평가해 여주문화원은(원장 김문영) 2012년 11월 17일 오전 10시30분부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의 생가(경기유형문화재 제46호)에서 명성황후의 탄신 161년을 기념해 숭모제가 거행됐다.

종전에는 매년 10월 ‘추모제’를 열던 것을 지난 2011년부터 여주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것을 경축하고자 ‘숭모제’로 전환했다.

사전행사로 취타대·사물놀이 공연과 함께 예조판서 행렬이 등장해 황후 탄생을 경축했고 여주향교유림회와 전주 이씨 종친회의 집례로 헌작례를 올렸다.

공식행사는 김춘석 여주군수를 비롯한 참석자들의 헌화와 분향, 기념사, 축사, 축시낭독 순으로 진행됐다. 이번 행사에서 눈길을 끌었던 대목은 ‘왕비 간택례’로, 고종의 후손인 ‘이석’이 왕 역할을 했고 왕후, 상궁, 사대부가 규수(처녀) 등이 함께하며 왕비 간택 의례를 생생하게 재현해 냈다.

또한 헌작례는 향교 유림회와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집례하고 김춘석 여주군수가 초헌관으로, 아헌관은 이우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산북면 분회장이, 종헌관에는 민병진 여흥민씨 종중삼방파 종중회 이사장이 맡아 진행했고 성우 박일씨가 홀기마다 설명과 해설을 들려줌으로써 행사의 전문성을 살리고 참가자들의 이해를 높였다.

이처럼 여주문화원은 ‘명성황후 숭모제’를 통해 우리 역사의 한 시대를 장식했던 명성황후의 넋을 위로하고 왜곡된 명성황후의 인식을 바로잡고 업적을 재조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글_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