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람 아니면 어디에 붙여야 잘 보이는지 몰라요!”
행사 홍보 걱정은 기우였다. 언제 연락이 되었는지 다양한 연령층의 20여명이 가평시 곳곳을 뛰어다니며 포스터를 붙인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다른 이보다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것마냥 모두 열심이다.
대학로 소극장 주변처럼 여기저기 초록색 테이프로 붙여진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순식간에 포스터를 붙인 이들은 한국 생활음악협회 가평지부 회원들이다. 가평에는 생활음악협회 뿐 아니라 문학회와 사진동호회 등 자생적으로 구성된 동아리가 많다. 그들이 하나같이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서로 끈끈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은 가평문화원(원장 조정현)의 가장 큰 자랑이다.
■ 내가 좋은 것만 하나, ‘마당쇠’도 해야지
가평 생활음악협회는 다른 곳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협회 소속 17개의 음악동아리가 그것이다.고등학생부터 70대의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돼 있다.
색소폰, 난타, 기타, 밴드 등 장르 역시 다양하다. 가평하면 떠오르는 재즈라는 음악적 이미지에 걸맞게 이들 역시 단순히 취미 생활 수준의 ‘동아리’로 접근하면 큰 코 다칠 만큼의 실력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 있다.
특히 연세 지극하신 어르신이 많은 색소폰 동호회는 그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폐활량을 자랑한다.각 동아리 단원들은 공연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부터 홍보에서 뒷정리까지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이처럼 일을 가리지 않고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모든 회원의 공통분모다. 세대별 장르별 다양한 음악 동아리가 오미조밀 모여 있어 서로의 공연에 협주가 가능하다는 것은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직장인과 학생임에도 매주 연습이 가능한 지 묻자 “아이고, 얼마나 기다리는데요.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여기서 다 풀어요. 나는 이거 안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몰라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정택원 생활음악협회 가평지부 사무국장은 “생업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며 각 동아리 모임이 가진 큰 힘을 강조한다.가평문화원에는 또 하나의 특별한 동아리가 있다. 가평지역을 글로 노래하는 ‘글두레 문학회’다. 가평 지역을 ‘시’라는 문학적 언어로 다듬어 온지 18년째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노래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작품으로 가평을 담아 놓듯이 우리는 글로 가평을 기억하죠. 가평에서의 추억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지 않나요? 모두들 실력도 있으시지만, 작품활동도 정말 열심히 하세요.”
김주린 글두레 문학회 회장의 말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오랜 시간 갈고 닦은 것은 탄탄한 글솜씨뿐 아니라 가평과 함께한 그들의 삶과 애정이 고스란히 서려있다. 회원 중 소영숙 시인의 작품 ‘하얀 고무신’은 노래로 만들어져 재즈보컬리스트의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한 소 시인은 음악 가득 띤 얼굴로 누구보다 열심히 박수치며 공연장을 지켰다고. 문학회 회원 역시 하나같이 자신의 글이 노래가 된 것처럼 반색하며 “내년에도 또 만들어 주나요? 내년엔 내 시가 뽑힐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시를 노래로 만드는 작업은 문인에게 색다른 경험이자 또 다른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열정적인 각 동아리의 활동과 장르가 다른 단체간 유기적 협업은 가평 문화원이 자랑하는 보석이다.
“재즈의 탄생배경은 삶의 예술적 투영입니다”
가평은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로 유명하다. 하지만 정작 주민에게 재즈는 어렵고 복잡한 음악 장르일 뿐, 내 삶의 이야기가 곧 재즈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지난 2012년 10월 27일 가평 구역사에서 열린 ‘그까이꺼 재즈!’ 행사는 음악이라는 공통된 단어로 묶인 이들에게 재즈 역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역임을 자연스럽게 알려주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당초 가평 구 역사앞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운좋게(?) 비가 내리는 바람에 2010년 이후 열린 적 없던 가평 폐역사가 열렸다.
프로그램은 가평 주민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을 과거의 기억과 그것에 연관된 내 생애 단 한 곡을 접수받아 라디오 공개방송 방식으로 진행됐다. 아이스크림통이 사회자석, 표 파는 곳은 음향 부스, 대기실은 전시장으로 폐역사 내부의 모든 물건이 고스란히 공연장이자 전시장이 됐다.
카페분위기로 꾸며진 역사 안에는 가평역의 지나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진과 동영상이 펼쳐졌다.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에서부터 경춘선의 마지막 운행모습까지, 마을 주민 뿐 아니라 먼 길을 찾아 달려온 사람들에게도 하나쯤 가지고 있던 경춘선과의 인연을 끄집어내게 했다.
폐역사 내부에 들어간 주민들은 과거 이야기로 들떴고, 사연 소개와 음악 연주에 주민들은 ‘진짜 라디오에서 사연이 소개되는 것 같은 기분’이라며 발그레해진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춘기 소녀가 됐다.
이날 방문한 코레일의 부역장 역시 “신 역사에서도 이런 공연 했으면 좋겠다. 비가오니 더 운치있고, 이 분위기, 마치 재즈카페 같은데요”라며 그간의 우려를 씻어내며 기뻐했다.공연을 만드는 사람과 그것을 보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민 스스로 만들고 즐기며 함께 박수쳐주는 모습이 보는 이들에게까지 생생한 에너지를 이끌어냈다.
이날 행사는 가평문화원을 창구로 생활음악협회와 글두레 문학회, 코레일과 그림마을, 가평군청, 문화집합36.5가 소통하고 네트워킹한 산물이다.
“저희는 하나도 한일이 없어요. 저희가 전문가의 손길로 혜택을 주려고 시작한 일인데, 오히려 이분들이 모든걸 만들어 가셨고, 저희는 서포트한 모양이 되었네요.”
문화집합 36.5의 기획자들은 문화원과 주민들의 소통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말한다.
조정현 문화원장은 “시작은 문화원이었지만 이제는 주민과 각 동아리가 함께 어울려 스스로 너무 잘해냈다”며 “가평 폐역사를 박물관으로 만들고 레일바이크도 설치한다는 등 많은 말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 많은 주민이 함께 사용하고 상설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또 “아직은 동아리 사람들이 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지 않았다”며 “대관이나 객석을 가득 채워야 하는 걱정 없이 정말 즐겁게 공연하고 작업할 수 있는 상설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통과 네트워크를 통한 대안적 문화공간 창출, 그리고 지연 주민이 주체가 되어 즐거운 삶을 이뤄가는 과정까지 제도권에서 해야 할 일이 문화원에서 해냈다.
행사가 끝난 후 ‘그냥 우리가 하는 일들이 즐겁다’며 조촐하게 선물한 지역 상품권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주변 식당으로 가는 주민들을 보면서 끈끈한 지역 사랑이 다시 한 번 느껴진다.
글_유쾌한 책상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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