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적과 흑’으로 유명한 스탕달은 ‘수많은 세월과 사건 뒤에도 내게 강하게 기억되는 건 오로지 사랑했던 연인의 미소뿐!’이라고 주절거렸다. 어디 연인의 미소뿐일까? 사랑에 빠지면 연인의 마마 자국도 보조개로 보일 정도로 넋을 잃는다. 눈에 콩깍지가 쓰이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사랑을 주는 것만큼 반드시 사랑을 받는 건 아니다. 노래와 문학과 영화 따위의 소재가 사랑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엇나간 사랑, 짝사랑, 갈등을 부르는 사랑만큼 좋은 소재는 없다.
토마스 만이 그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지극한 사랑을 하는 자는 이미 패배한 자이며 괴로워해야만 한다’고 설파한 이유도 사랑의 비극성을 이른 것이리라. 이 말은 사랑의 승리자가 되려면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역설에 이른다. 나아가 남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간에도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식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베푼다(요즘은 그렇지만도 않지만…). 그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도 생겼을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일방적인 사랑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사랑에 빠진 부모를 ‘이용’하기도 한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지극한 사랑을 하는 자는 이미 패배한 자이다! 부모 자식 간의 경우 플로베르의 ‘두 연인은 동시에 똑같이 서로를 사랑할 수 없다.’는 말도 들어맞는다. 남녀 간의 사랑일 경우 이 말은 짝사랑이나 갈등을 부르는 사랑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가요와 각종 서사물에 사랑이 빠질 수 있겠는가? 사랑 자체가 바로 이야기가 되는데….
사랑에 빠져 있을 땐 사랑이라는 말이 불필요하다. 요즘 인터넷상에서 악플을 달고도 태연히 ‘정신적 승리’라고 주장을 하는 이가 많은데, 정신적 승리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아Q정전’을 쓴 루쉰(노신)은 40대 중반 때 20대 후반이었던 그의 제자 쉬광핑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시대와 문학과 친구, 그리고 일상의 문제를 편지에 담기에 충분했다. 굳이 사랑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삶을 함께 나누면 그만이었다. 사랑은 그런 것. 사랑이라는 말로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일상을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둘은 나중에 함께 살았다. 사랑을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지 않은 경우일 것이다. 두 사람에게 사랑은 지성의 힘으로 지향하는 바를 같이 가꾸어가는 삶 자체가 아니었을까?
사랑이 끝나면 그때는 사랑이라는 말로 사랑을 확인하려 한다. 노래에서 ‘싸랑’이라고 악을 쓰는 건 이미 사랑이 끝나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사랑은 확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노래 대신 편지를 쓴 이가 많다.
이른바 정신적인 사랑의 대가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이 땅의 시인 유치환이다. 그는 이영도 시인에게 20년에 걸쳐 무려 5천통에 이르는 편지를 썼다. 유치환 시인의 사후 이영도 시인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을 묶어냈다. 책 제목은 유치환 시인이 쓴 시 ‘행복’의 한 구절이다. 두 사람 모두 정신적인 사랑을 강조했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유치환 시인은 다른 여인에게도 5년에 걸쳐 편지를 썼다. 이래서 우리 속담은 ‘품마다 사랑 있다’고 했는지 모른다.
정말 정신적인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과 별개인가? 철학자 스피노자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큼 신을 만난다’고 했다. 그런데 능력만큼 만나는 게 신만일까? 사랑도 그러하지 않을까? 그 사람의 능력만큼 사랑도 하리라. 정신적인 사랑이든 육체적인 사랑이든 두 사람이 갈망하는 그만큼이 사랑의 능력이리라.
박 상 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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