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나이 먹는 즐거움

“형!…”하며 걸려온 전화가 있었다. ‘형’이라는 단어를 정말 오랜 만에 들었기에 가슴이 뛸 지경이었다. 내가 대학을 다닌 80년대에는 남녀불문하고 손 위 사람이면 모두 ‘형’이라고 했기에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얼굴본지 20년이 넘는 여자 후배의 전화였는데, 전화한 후배는 마치 엊그제 헤어진 것처럼 해맑게 말을 이어갔다.

대수롭지 않은 부탁과 소소한 신변잡기를 풀어놓는데 나는 이미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회상된 과거는 연록색의 따뜻한 공기에 휩싸인 기분 좋은 곳이었다. 아아, 그렇게 아름다운 시절이었구나.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렇게 좋았던 시절이었는데, 남들 눈에는 시시했을지 몰라도 딴에는 심각하게 고민하며 허둥대던 청춘이었는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짠했다. 그때가 그렇게 아름다웠던 시절이었음을 안 것도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벨기에의 연구팀이 흥미로운 조사를 진행하였다. 2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사람의 나이에 따른 행복의 정도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인데 그 결과가 놀라웠다. 30대부터 행복의 정도가 점차 낮아지다가 40대가 되면 최저점을 찍은 후, 서서히 올라가서 80대에 최고점에 달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40대는 부모와 자식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심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감정을 갖지 못하다가 80대가 되면서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만족도가 가장 큰 것이라고 분석을 했다. 나이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줄여주는 연구 결과이다.

내가 참여하는 모임 가운데 벽오사(癖五社)라는 모임이 있다. 시서화음주친구의 5가지를 좋아하는 벽(癖: 고질)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인데, 벽오사 모임에서 언제나처럼 술 마시고 떠들고 하다가 ‘좋았던 옛 시절’을 회상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어느 나이대가 가장 좋았던가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할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날의 결론은 30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대 젊은이들은 “그 나이가…?” 하고 놀라겠지만, 그 정도의 나이라야 필요 없는 데에 정열을 낭비하고 마음을 소모하곤 하는 젊음의 치기를 털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날의 결론이었다.

이후로 벽오사 사람들과 이런 얘기를 또 다시 하지 않았기에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다시 얘기를 하게 된다면 같은 결론이 나올지는 모르겠다. 몇 살 더 먹었으니 나이가 좀 더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젊었을 때에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지금의 안온한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가족과의 따뜻한 대화와 웃음이 얼마나 행복감을 주는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주변을 배려하고 남의 감정을 헤아리기 힘든 시절이 젊음이다. 그래서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했나 보다.

동양의 선비나 학자라고 해서 모두 늙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대만의 유명한 철학자 방동미가 1977년에 78세로 돌아갈 때 삶에 보인 집착은 유명하다. 그의 삶에의 집착이 너무나 속물스러운 양태를 보이게 되자 제자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고 전한다.

연로하신 선생님의 인간적인 모습이니 이해하자는 쪽과 너무도 좀스러워 보이는 스승의 행보에 실망을 느껴 제자이길 포기하다시피한 쪽으로 나뉘었다는 삼류소설 같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인간이 약한 존재임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일인데, 방동미의 생애의 집착은 역설적으로 인생이 아름답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이젠 방동미를 이해할 듯도 하니 역시 나이를 먹게 되었나 보다.

김 상 엽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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