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소금이 참 흔하지만 예전에는 소금이 참 귀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귀한지 그리스에서는 소금의 가치가 금의 가치와 비슷하였으며, 고대 로마 시대에는 군인들의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금이라는 ‘salt’라는 단어가 일꾼들에게 주는 봉급이라는 ‘salary’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소금을 얻는 방법이 우리 나라와는 조금 다릅니다. 요단강에서 사해에 이르는 1천킬로미터에 이르는 요단 지구대는 해수면보다 고도가 낮은 지형입니다. 학자들은 이 곳이 빙하기 이전에는 바다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합니다. 과거 바다였던 때문인지 이스라엘에는 소금 광산이 많이 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소금같은 사람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어 내는 대신 이스라엘에서는 땅에서 소금을 파냅니다. 그런데 소금 중에는 모양은 소금이지만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소금이 있습니다. 빗물로 인해 짠 맛을 모두 잃어버린 소금입니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소금을 파내게 되면 사람들은 실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맛을 잃은 소금은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혀지게 됩니다.
사람에게도 저마다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고난이나 어려움을 겪으면서,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자신의 모든 맛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짠 맛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중해 연안에서 서식을 하는 들오리들이 여름동안 노르웨이로 이동하는데 마침 네덜란드의 상공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날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 농가의 뜰에서 집오리들이 평화롭게 모이를 줍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들오리가 갈 길은 아득하고 또한 피곤하여 그만 평화롭게 보이는 집오리 떼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 앉았습니다. 그 집오리들은 들오리에게 융성한 대접을 해 주었습니다.
며칠 후에 들오리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자기 대열을 찾아 가려고 날아 보았으나 그 동안 몸에 기름이 끼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겨울이 되어 창공을 날아가는 자기 대열을 보자 허전해지고 마음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날개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쳐다만 볼 뿐이었습니다. 해가 거듭되면서 그러한 양심의 가책마저도 없어졌습니다. 몇 년 후에는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게 되었고 들오리는 완전히 집오리가 되어 시궁창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짠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답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속으로 녹아 소금의 사명 다하길
소금이 더 큰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알갱이 그대로 있기 보다는 녹아지고 어우러져야 합니다. 국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음식 속에 어우러져야 합니다.
제가 섬기는 교인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짠 맛 나는 소금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세상 속으로 녹아져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세상 속으로 녹아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짠맛 나는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시길 부탁드립니다.
김병삼 분당 만나교회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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