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오기 직전의 이 날씨를 뭐라 해야 할까? 후덥지근하다? 그렇다. 한 마디로 ‘후덥다’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더운 것만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훅훅 거리게 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렇게 후더운 게 그나마 더 낫지 않을까? 장마 뒤의 쨍쨍 터지는 불볕더위보다는.
여름휴가 장소로는 보통 푸른 산하의 계곡과 바다일 터이지만, 날마다 휴가가 아니니 가끔 겨울풍경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눈 덮인 12월의 산을 말이다. 오리털 파커로 무장한 채 겨울산행을 하고 있는 자신을 그려보는 것도 썩 괜찮을 듯싶다.
강경구의 ‘12월’은 눈 덮인 산일뿐만 아니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위산이다. 인왕산의 거대한 바위 봉우리가 똑 저렇게 생기지는 않았으나, 그 꼴의 힘찬 기세(氣勢)를 더듬어 생각해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치 한지에 농묵의 먹 붓을 휘둘러 그린 듯 캔버스에 힘찬 붓질로 검고 흰 아크릴 물감을 풀어헤쳤다. 하얀 눈과 산의 지세(地勢)가 하나로 뭉쳐서 이룬 12월의 저 풍경은 사실의 풍경이되, 마음을 잇대어서 정신의 풍경을 이룬 겨울 산의 고고한 상징일 터.
강경구의 겨울 산은 무참하다. 일말의 색채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 저 겨울풍경은 시커멓게 타 올라서 오히려 자신의 경계를 이루고 터를 이룬 듯하다.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 지세의 가파른 계곡들과 얼음 폭포조차 전체로서의 산과 그 산의 몸에 결박되어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260㎝의 높이와 190㎝의 넓이를 그득하게, 충만하게 채우고 있는 기운생동의 필치는 그 앞에 선 관람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희고 검은 것들의 색채가 서로 충돌하고 부딪치면서 한데 어울리는 산의 형세(形勢)와 한겨울의 중심으로 치닫는 12월의 깊은 종울음이 저 풍경에 있다. 깊고 낮은 종울음으로 12월은 한 해의 끝이 되고 시작이 되는 혼돈의 창조적 생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저 검은 산은 무수한 생명을 씨알을 포태한 산이기도 할 것이다.
더운 여름이 깊어갈수록, 푸른 산하의 초록빛 그늘이 짙어갈수록 가끔은 12월의 겨울 산을 찾을 일이다. 저 검은 설산의 어디쯤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산악인이 되어 볼 일이다.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