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약간의 설렘 속에 초대받은 파리의 전형적인 중산층 저택에 도착한 기자는 중년 여인의 안내를 받으며 응접실에 들어섰다. 여인은 차와 함께 그 동안 살펴보라는 의미에서 딸아이의 사진, 스케치북 등을 꺼내 왔다.
입양 전 한국에서 찍은 어린 아이 적의 사진, 프랑스로 막 입양됐을 때의 사진, 학교 다니며 밝게 웃는 사진 등등 사진 속의 소녀는 어릴 적이나 서양 옷을 입고 있을 때나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하며 복잡한 상념 속에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은 기자는 스케치북에 그려진 소녀의 그림을 본 순간 눈시울이 뜨끈해지고 말았다.
파리는 대평원에 자리 잡은 도시이기에 산이 보이지 않아 파리의 어린이들이 풍경화를 그릴 때면 으레 도화지의 중앙에 수평선을 죽 그은 후 위는 하늘색을 칠하고 아래는 건물과 사람 등을 그리곤 하는데, 이 소녀의 그림에는 구불구불한 우리나라 산의 윤곽선이 그려져 있었다.
학교 입학하기도 전인 5살 전후에 프랑스로 입양 온 소녀의 눈에 우리 산하의 실루엣이 똑똑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얼마 보지도 못했지만 우리 산의 모습은 소녀의 뇌리에 깊이 담겨져 무의식중에도 구불구불한 모양의 선이 그려졌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이다. 이 내용은 나의 고등학교 시절 집에서 구독하던 시사주간지에서 읽은 것이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기억이란 우리의 뇌리 속에 이토록 강하고 깊게 아로새겨지는 것인가 보다. 별것 아닌 듯 무심하게 주변을 스쳐가는 이미지들이 자신도 모르게 머리 속 깊이 또렷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고 한편으로는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특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백지에 물감 붓을 대는 것 같이 그대로 그려지나 보다. 어린 시절의 기억뿐이랴. 중고등학교 다닐 적에 읽은 시, 소설의 구절은 머리 한 구석에 남아 있다가 센티멘털해질 때면 어디선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걸 보면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가 하면 성인이 된 이후에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메모를 하지 않으면 책 제목마저 가물가물하다. 이런 경우를 쉽게 나이 탓이라고 치부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기억이라는 바탕에 너무 많은 덧칠이 가해져서 원형의 잔상이 잘 남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뜬금없이 기억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다름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기억만 유념하면 많은 부분이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식언을 밥 먹듯이 하는 정치인들, 지역감정을 넘어 지역차별을 조장하는 자들, 역사를 오도하고 왜곡하는 일베충들, 말도 안되는 논리로 진실을 호도하는 학자의 탈을 쓴 사기꾼들, 진실을 알리기는커녕 오보의 책임조차 지지 않는 사이비 언론인들, 탈세에 불법을 밥 먹듯이 하는 기업들 등등에 대한 기억만 똑바로 해도 이런 자들이 설 자리는 없어지고 세상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비정상적이고 황당한 사건들이 줄지어 발생하는 우리 같은 사회에서 모두 기억했다간 단박에 정서불안이나 조울증에 걸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김상엽 건국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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