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일 ‘여주시 승격’ 118년만에 자존심 회복
소년의 아버지는 역무원이셨다. 아버지는 수원-여주 간을 잇던 협궤 철도 노선 위에서 기능직 공무원으로 평생을 일하셨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던 아버지는 6남매의 맏아들을 인천 제물포고등학교로 유학(?)을 보냈고 서울대에 입학시켰다. 젊은 역장이 아버지를 “김주사, 김주사” 부르면서 일시키는 장면을 수없이 보면서 소년은 그냥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철도와 더불어 일생을 바쳐온 아버지의 성실함을 닮은 소년은 1973년 제14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합격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 후 소년은 아버지처럼, 아버지와 같이 강직하게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여주군의 수장, 김춘석 군수의 이야기다. 30년 중앙부처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고 지난 2010년 6·2지방선거를 통해 고향 여주로 돌아온 김춘석 군수를 지난 7월 11일 만나 지난 3년간의 고향살이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주목(牧)의 영광과 명예와 긍지를 되찾자
취임 이후 3년동안 흘린 땀방울 ‘도·농복합 시’로 화려한 결실
김춘석 군수는 등산 마니아로 유명하다. 25년 넘게 산을 탔지만 최근 몇 년은 마음 편하게 산에 오를 시간이 없었다. 올 초 자전거를 사놓고도 한 3번 탔나 싶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다. 보름에 한 번 하는 염색할 시간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생활적인 측면에서 김 군수의 고향 여주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고된 행군의 연속이었다.
특히 취임 3년을 맞아 여주군은 큰 변화의 기점에 놓여 있어 김 군수도 눈 코 뜰 새 없다.
여주가 2013년 9월 23일자로 ‘도·농복합형태의 시’로 새 옷을 갈아입고 남한강에서 힘차게 날아오르기 때문이다. 이는 ‘경기도 여주시 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안’이 지난 5월 7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고 6월 4일 법률이 공포됨으로써 최종 확정됐다.
정부입법으로 추진한 ‘경기도 여주시 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됨으로써 여주는 오는 9월 23일자로 ‘여주시’로 승격하게 된다. 이로써 여주는 1895년(고종 32) 여주목에서 ‘군’으로 강등된 이래 118년 만에 ‘시’ 승격 이라는 경사를 맞이하게 됐다. 그래서 김 군수는 그 어느 해보다 바쁘고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여주가 크게 부흥했던 시기는 지난 1469년(조선 예종 1년) ‘여흥’을 ‘여주’로 고치고 ‘여주목’으로 승격하여 목사가 다스렸던 때입니다. 이제 118년 만에 ‘도·농복합 여주시’로 승격됨으로써 다시 한번 번영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평가됩니다. 여주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낸 이번 성과에 따라 향후 시 설치에 따른 후속조치를 철저히 추진함으로써, 주민들에게 품격 있고 더욱 향상된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게 됐습니다.”
김 군수는 집무실에 ‘류한흥국(流汗興國-땀을 흘려 나라를 일으킨다)’ 사자성어를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되새기며 일한다. 30년 넘게 중앙부처에서 일한 공무원 출신이지만 이제는 ‘류한여주(流汗驪州-땀을 흘려 여주를 일으킨다)’ 신념으로 일하고 있다.
도시행정수요 효과적 대응·지역발전·주민편의 증진 ‘방점’
시 승격, 시민체감 행정 실현위해 ‘여주시 설치 준비단’ 풀가동
김춘석 군수는 시 설치 출범에 따른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해 차질 없이 추진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우선 여주시 출범에 따른 준비를 총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여주시 출범을 위한 준비단’이 구성돼 부군수가 직접 관련 추진사항을 치밀하게 점검해 나가고 있다.
‘여주시 설치 준비단’은 부군수가 준비 단장을 맡고, 자치행정과장을 부단장으로 하는 1단 4반 18명으로 구성돼 있다.
분야별로는 시 승격에 따른 기획 조정과 행정구역 조정, 지역의료보험 안내 등에 관한 제반사항을 총괄하는 ‘총괄반’, 시 설치에 따른 주민홍보와 여주시 통합브랜드 개발, 조직개편에 따른 예산편성과 자치법규의 정비 등을 맡은 ‘예산 및 법제, 홍보반’, 가족관계 등록과 각종 표지판의 정비, 지적공부 등의 사항을 처리하는 ‘공부정리반’과 시가 되었을 때 전산자료의 변환, 홈페이지의 정비, 재산 인계 인수준비 등을 맡은 ‘재산관리반’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김 군수는 시 승격에 따른 대민 행정서비스향상이 가장 우선돼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여주군청 본청에서 실시하던 ‘간부회의’를 각 읍면을 직접 찾아가 현장의 실정을 반영하는 ‘찾아가는 간부회의’로 전환해 적극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김 군수는 시 설치에 따른 향후 여주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비전 2025 여주 중장기 발전 계획’도 수립 중이다. 또 시 설치에 따른 준비작업을 모두 마무리 하고 오는 9월 23일 여주시 개청행사를 갖고 이날을 ‘여주 시민의 날’로 승화시켜 모든 주민이 다함께 참여하는 축제의 한마당으로 만들어낼 계획이다.
축제를 만끽하기 전, 김 군수는 요즘 시 승격으로 인한 주민생활 향상과 여러가지 변화상을 주민들에게 홍보하고 설득하는 작업에 올인하고 있다.
“시 주민생활 향상 또한 기대되는데 그 예로 기초수급대상자와 노인 등의 대상자들에게 복지 지원이 한층 확대됩니다. 물론 동 주민의 경우는 건강보험료나 환경개선부담금 등 일부 부담이 증가할 수 있으나 다른 시 지역 또한 같기 때문이 시간이 지나면서 완충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 시 승격 후 3년이 되면 농어촌특례입학 혜택이 사라지게 되지만, 집중적인 교육 투자와 명문학교 육성 등 지원으로 보완하며, 행정·복지·의료·문화·관광분야 등도 시 승격에 걸맞도록 단계적인 업그레이드가 이뤄지도록 할 방침입니다.”
이처럼 김 군수는 ‘군민을 위한 적극 행정’을 통해 여주군의 변화와 여주군청 공무원들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중앙부처 30년 생활보다 여주군수 3년이 더 행복하다
집념의 사나이… 시승격 보다 공무원들 변화가 가장 큰 보람
김 군수가 2010년 취임했을 때 당시 700여 명의 여주군 공무원들은 소극적이고 변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중앙 부처에서 오래 일했던 그의 경험상 같은 공무원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취임 초창기에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버럭군수’다.
“여주군은 1960년부터 현재까지 인구가 11만을 넘지 못하는 각종 규제로 발묶인 지역입니다. 그러다 보니 공직자들도 어떠한 민원에 대해 ‘안 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취임 후 가장 먼저 공직자 마인드부터 바꾸자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군민을 위한 적극행정상’을 만들어 공직자 11명을 승진시켰습니다. 3년이 지난 현재 여주 공무원들은 안 되는 여건 속에서도 군민을 위한 작은 틈새를 고민하는 적극적인 공직자로 변했습니다. 시 승격 보다 우리 공직자들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변화가 가장 큰 보람입니다.(하하) 그리고 중앙 부처 30년 생활보다 여주군수 3년이 더 행복합니다.”
김 군수는 딱 세 가지 경우에만 화를 낸다. 거짓말 하고, 불친절한 것 그리고 서류를 깔고 앉아 안 된다고만 하는 경우다. 이제 더 이상 김 군수는 화 낼 일이 없다. 그만큼 공직자들은 변화했다.
여주군수 김춘석은 집념의 사나이다.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1학년 때 자취를 하면서 연탄불 위에 밥을 해먹고 국을 끓여 먹었던 힘든 시절에도 그는 오직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집념 하나로 버텼다. 목적은 명료했다. 공무원이 되어서 후손들을 위한 행정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김춘석은 그 꿈을 이뤘고 지금 현재 고향 여주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의 집념은 여주를 변화시켰고, 여주를 살려냈고, 시 승격에 발맞춰 남한강에서의 힘찬 비상을 이끌고 있다.
글 _ 강현숙 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 _ 추상철 기자 sccho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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