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홍성담의 ‘청신’

얼마 전 한 노동자가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이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죽음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땅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하청 노동자들 위한 죽음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가난한 한 가장의 절규라고 불러야 할까?

홍성담의 ‘청신(請神)’은 무당이 종이돈을 쥐고 춤추는 지전춤(紙錢舞)의 첫 순서에서 따온 말이다. 지전춤은 동해 오구굿이나 진도 씻김굿에서 볼 수 있다. 씻김굿이 이승에서 풀지 못한 망자의 원한을 풀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굿이니 지전춤의 뜻도 그와 다르지 않다.

지전춤은 하얀 한복을 입은 무당이 여러 개로 길게 이어진 흰 백지 엽전 뭉치를 양손에 들고 사방으로 휘휘 저으며 추는 춤이다. 이 춤은 신을 부르는 청신(請神)으로 시작해 정화단계인 세령(洗靈), 신을 달래고 즐겁게 하는 오신(娛神), 귀신을 쫓는 축귀(逐鬼), 신을 환대해 돌려보내는 송신(送神)으로 이어진다. 그 모든 과정의 핵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질고 사나운 운수인 액(厄)을 막고 또한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모질고 독한 귀신의 기운인 살(煞)을 푸는데 있다. 한 마디로 살풀이 춤인 셈이다.

그러므로 홍성담의 작품 ‘청신’은 그 말 그 뜻 그대로 ‘신을 부르는’ 데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씻김굿의 한 형태로서 지전춤이 갖는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하얀 종이엽전 뭉치를 그리고 지전 끝에 ‘눈(目)’을 달았다. 청신이 신을 부르는 것이니 그 눈은 신, 즉 망자들의 눈일 터. 그렇다면 그 망자의 실체는 무엇일까?

홍성담은 20세기 근현대 한국사의 그늘에 가린 숱한 영혼들에 주목해 온 작가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영혼들을 그린 ‘야스쿠니 연작 회화’를 비롯해, 오월 광주를 그린 ‘오월판화 연작’, 시화호 생태문제를 다룬 ‘바리 연작’까지 그는 생명의 미학을 추구해 왔다. 그리고 그 미학은 동아시아의 오래된 전통인 굿과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청신’의 눈빛은 바로 거기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다.

지전춤은 제자리 춤이 많고 뛰는 동작은 없으며 무겁고 적적하며 우아하다고들 평한다. 굿거리 장단, 선부리 장단, 떵떵이 장단, 자진모리 장단이 반주로 쓰이고…. 나는 홍성담의 ‘청신’이 전태일과 얼마 전 작고한 노동자를 불러 씻김굿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무겁고 적적할지라도 굿거리 에서 자진모리로 이어지는 굿장단을 타다보면 그들의 영혼이 평안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두 손 모아 송신(送神)하리라!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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