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리버풀의 38인

1993년 영국의 리버풀에서 네 살짜리 남자아이가 열 살 정도의 남자아이 두 명에게 4㎞를 끌려가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네 살짜리 아이가 강제적으로 4㎞를 끌려가는 것을 38명이나 보았으나 적극적으로 제지하거나 경찰에 신고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 이 사건은 영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려 왔고, 이 사건을 ‘리버풀의 38인’이라고 칭하였다. 그 결과 영국은 ‘네이버후드 와치(neighbor watch)’라는 자율방범대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최근 필자가 근무하는 강력팀 사무실로 중년남자와 젊은 여성이 찾아왔다. 옆에 있는 젊은 여성은 자신의 딸이고 우연히 알게된 남성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필자는 성폭행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는지를 피해자에게 묻자 같은 학과 여자 선배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수시로 상담하였다는 내용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필자는 곧바로 피해자의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러고 이와 같은 내용을 진술서로 작성이 가능하냐고 묻자 여자선배는 자신의 아버지와 상의해봐야겠다고 하여 일단 통화를 끝냈다.

다음날 전화를 하니, 여자선배의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며 “우리 아이는 그 사건과 아무 관계없으니 앞으로 절대 전화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전화연결을 시도하였으나 강한 거부 반응을 보여 다른 증거를 수집하는 것으로 수사가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자유는 책임과 희생이 따른다. 범죄로부터의 자유도 마찬가지로 책임과 희생이 따른다. ‘리버풀의 38인’중에 단 한 명이라도 네 살 아이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그 네 살 아이는 여전히 아름다운 리버풀의 야경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범인이었던 당시 열 살에 불과했던 가해자들도 철없던 어린 시절을 부끄러워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까?

조영호 파주경찰서 형사과 강력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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