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관용없는 사회

이연섭 논설위원 yslee@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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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tolerance)’는 프랑스어로 ‘관용’이라는 뜻이다. 포용력, 이해, 인내심이라는 뜻도 포괄한다. ‘당신의 정치적·종교적 신념과 행동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우선 남의 정치적·종교적 신념과 행동을 존중하라’. 이것이 똘레랑스의 출발점이다.

똘레랑스는 홍세화씨의 저서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한국에 퍼뜨려졌다. 홍씨는 책에서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다. 흔히 말하듯 한국 사회가 정이 흐르는 사회라면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가 흐르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관용’은 원래 서양의 종교 갈등에서 발전한 개념이다. 가톨릭 중심의 중세 사회에서는 이단 심문, 마녀 재판이 횡행했고 종교개혁 이후 구교와 신교간 전쟁이 벌어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어 계몽주의를 주창하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길로 나아갔다.

 

관용은 근대이후 사상의 자유를 살리는 방향으로 의미가 확장되고 부르주아와 노동자 등 계층간 갈등을 협력으로 전환하는 개념으로 정착됐다. 오늘날 인종, 성, 동성애 차별 등의 금지도 관용정신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관용이 부족한 사회다.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한 정치문화, 그래서 늘 대립하는 정치권, 계층간 갈등, 지역간 이기주의, 개인주의의 팽배, 타인에 대한 배려 부족 등 사회 구석구석에서 그 증거들이 포착된다.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지나친 경쟁사회 속에 살면서 성장과 효율성에 집중된 사회문화가 이러한 결과를 낳은 듯 싶다.

실제로도 한국사회의 관용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로 나타났다. 박명호 한국외대 교수가 발표한 ‘지표를 활용한 한국의 경제사회발전 연구:OECD 회원국과의 비교분석’ 논문에 따르면, 1995년 25위였던 한국의 관용지수가 15년이 흐른 2009년 31위로 추락했다.

타인에 대한 관용, 장애인노동자 관련 법률수, 외국인 비율 등으로 측정한 것인데 부끄럽게도 꼴찌다. 관용지수는 한 나라의 사회통합력을 가늠하는 잣대로, 관용지수 꼴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는 말로만 사회통합을 외쳤지 실상은 사회통합이 위기 수준이다.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 못지않게 타인에 대한 관용과 존중이 절실하다. 이제 관용과 배려를 통한 사회통합과 경제성장은 같이 가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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