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농군학교 양평시대
가나안농군학교에 들어서면 ‘조국이여, 안심하라’와 ‘정신개척’,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는 설립자 고(故) 김용기 장로의 오롯한 가르침이 새겨진 바위들이 이방인들을 맞는다.
가나안농군학교는 지난 1962년 설립된 뒤 강산이 6차례 바뀌는 동안 지구촌의 유일무이한 농군(農軍) 사관학교로 국내는 물론, 세계 곳곳에 참 농군들을 배출해왔다.
이 학교의 프로그램은 1일 과정, 1박2일 과정, 2박3일 과정(월~수요일, 수~금요일), 3박4일 과정(월~목요일), 4박5일 과정(월~금요일) 등으로 나뉜다.
입교하면 어떠한 과정이든 새벽 5시에 기상한 뒤 점호를 받고 3시간 동안 체력단련과 새벽 강의 등을 거쳐 아침식사를 하고 오후 7시부터 1시간30분 동안의 야간수업을 받은 뒤 오후 10시가 돼야 잠자리에 눕는, 군대보다 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모토로 설립
이 학교의 아이콘인 ‘개척종’은 동이 트기도 전에 어김없이 울린다. 이처럼 고단한 커리큘럼을 통해 한 사람의 진정한 농부로 거듭 태어난다.
‘인간성 상실과 회복’, ‘변하지 않는 삶의 진리’, ‘효를 통한 가치관 정립’, ‘가정의 의미’, 개척사(개척정신’)’, ‘화합과 협동의 공동체’, ‘복민주의 사상’, ‘의식개혁과 블루오션 행복’, ‘암과 예방’, ‘사회발전과 가치관’, ‘국민건강과 유기농업’, ‘효과적인 의사소통’…. 실제로 텃밭에서 농사를 체험하는 근로실습과 각종 운동경기를 펼치는 체력단련 이외에도 이 학교의 강의과목들은 이처럼 다양하고 탄탄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느 날 고 김용기 장로를 만나고자 가나안농군학교를 찾았다. 한해 전 쿠데타로 집권한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이었고, 장관급인 최고위원 30명과 함께였다.
박 의장은 “우리 민족은 반드시 다시 일어서야 하는데, 가나안농군학교의 교육이념을 접목한 국민캠페인을 펼치고 싶은데, 제가 뭘 드와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이 자리에서 고김 장로는 “그저 안 도와주는 게 도와주시는 겁니다”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1962년 2월7일이었다. 당시 20대 청년으로 아버지를 도왔던 김평일 교장은 당시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10여 년 뒤 고 박정희 대통령은 가나안농군학교를 모태로 새마을운동을 창안했고, 오늘날의 번영을 가져다준 동력이 됐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되는 새마을노래도 이 학교 커리큘럼과 교정에 설치된 ‘개척종’에서 연유됐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새마을운동도, 가나안농군학교도 모두 외면받고 있다.
김평일 교장에게서 듣는 김용기 장로의 삶
김평일 교장은 아버지를 닮아 사무실도 몇 사람 들어가기도 버거울 정도 비좁다. 그를 보면 자연스럽게 김용기 장로가 연상되는 까닭이다. 그의 공부방은 창고, 숙소는 그 옛날 토담집이다.
“한 소년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선양(瀋陽)에 도착했습니다. 조국을 구하려고 무장투쟁이 필요했고 무장투쟁의 선봉장이 되려면 마적단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때 한 목사가 나타나 “지금 당장 조선으로 돌아가 조국부터 지도하라”고 호통을 칩니다. 가나안농군학교의 전신인 가나안농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흙의 철학을 전파하는 가나안농군학교는 외적의 침략보다 더 무서운 건 가난과 부패로 이것을 물리치려면 농군(農軍)이 필요하다는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김 교장은 자칭 명예 효학(孝學)박사 1호다. 1970년부터 시작한 효 운동 ‘내리사랑 올리효도’ 캠페인이 벌써 40년을 넘었다. 그는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에 이어 ‘효도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자’고 외친다.
1980년 ‘효 십계명’을 만들고 ‘효 실천의 노래’(문성모 곡)의 노랫말도 지었다.
통일운동도 펼치고 있다. 지난 2007년 탈북여성들로 구성한 평양통일예술단은 전국 각지와 미국 등지에서 1천 회가 넘는 공연을 소화했다.
양평=허행윤기자 heohy@kyeonggi.com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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