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 그 역사를 찾아]4.경기도 지방의 동학혁명_ 동학혁명 이전 경기도 동학의 상황

안교선ㆍ서인주 등 동학포교 주도… 道 전역서 민란 활활

동학이 경기도에 처음으로 포교된 시기는 동학이 창도된 지 2년 후인 1862년으로 보인다. 1860년 4월 5일(음) 경주 용담에서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이듬해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포교를 전개하였다. 초기 경주를 중심으로 포교되기 시작한 동학은 새로운 삶을 갈구하였던 민중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입도하였다.

이와 같이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수운 최제우는 1862년 경북 흥해에서 동학 최초의 조직인 접주제를 실시하였고, 이때 경기지역에도 접소가 설치되어 본격적인 교단조직체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883년 들어서는 손병희 박인호 등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인물들이 해월 최시형을 방문하여 지도를 받았는데, 이때 경기지역에서는 안교선과 서인주 등이 참여하였다.

이후 안교선은 안교백, 안교강 등과 수원을 비롯하여 경기지역에 동학을 포교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문하인 안승관 김내현 이민도 등이 수원지방의 유력한 지도자로 급부상하였다. 한편 서인주는 수원 출신으로 1883년 3월 손병희 김연국과 함께 해월 최시형을 방문한 이후 동학교단에 투신, 공주교조신원 운동을 비롯하여 동학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경기도에서는 1893년 2월의 광화문복합상소에 이용구가 대표로 참여하였다. 광화문 복합상소는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 달라는 동학도들의 집단 상소였다. 그러나 당시의 왕조는 이들을 적당히 달래는 방법의 미봉책으로 마무리했다. 이에 그해 3월에는 다시 동학도들이 집단적으로 충청도 보은에 집결해 이른바 보은취회를 개최하였다. 보은 장내리에서 전개된 동학교도들의 대규모 민회였던 ‘장내리 동학집회’는 그 기치로 척왜양창의와 보국안민을 높이 들고 일어선 반제국주의 운동의 효시였다. 이 운동은 19세기에 거칠 것 없이 들이닥친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안전을 도모하는 보국과 안민을 이루는 방법으로 척양척왜를 외친 동학도들의 구국운동이었던 것이다.

당시 보은에만 약 3만 명에 이르는 동학도들이 모여 평화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했었다. 장내리의 동학집회는 평화적인 시위운동으로 일관했지만 이듬해 전개된 우리 민족 최고의 민중 중심의 조직적 저항운동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을 예고하는 거대한 들불과도 같은 운동이었다.

보은의 장내리 집회에 경기도에서는 광주, 파주, 송파, 수원, 용인, 안산, 안성, 여주, 이천, 죽산 등 거의 전 지역을 망라하고 있으며 수천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는 동학혁명 직전에 경기도 지역의 동학도의 숫자가 이미 상당했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부패상과 경기도 지역의 저항

성리학적 통치이념의 한계에 부닥친 조선 왕조의 부패와 타락은 그 말기로 갈수록 더욱 심화되었다. 전국 각지의 탐관오리는 들끓고 백성들은 오갈 데를 잃고 있었다. 당시의 가렴주구에 대항하는 백성들의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나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였다. 대표적으로는 1811년의 홍경래의 난에서부터 1862년의 진주민란을 들 수 있다. 진주민란이 발생한 1862년 한 해에만도 경상도에서 17회, 전라도 9회, 충청도 9회, 경기도와 황해도, 함경도 등지에서는 1회 등 총 37회의 농민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들 민란은 죽창과 몽둥이를 든 농민들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대부분 고을 수령의 폭압적 행위에 대항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동헌을 점령한 농민들은 수령을 쫓아내거나 인부를 탈취하여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관아의 문서를 불태우고 수탈을 일삼았던 향리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불태우는 등의 과격성을 띄기도 했다. 특히 철종 대에서 고종 대까지 이어진 삼정의 문란은 농민봉기에 불을 끼었을 역할을 하였다.

국가조세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삼정은 전정과 군정 그리고 환곡을 말하는데 전정은 기본적인 세제이고 군정은 군역의 의무에 부과하는 세금, 환곡은 미리 지급하고 추수 이후에 회수하는 빈민구제책이었으나 이미 고리대금업이 된 뒤였다.

삼정수탈의 강화는 19세기 중엽 조세수취체제를 와해의 위기로 몰고 갔으며, 이는 또한 수취체제 뿐만 아니라 봉건사회 전반을 해체시키는 농민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민중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자연재해였다. 즉, 수년마다 닥쳐오는 자연 재해에 따른 농업생산의 감소는 단기적으로는 가장 큰 재정압박의 요인이 되었다. 특히 수재와 한발 등의 자연재해는 직접적인 농사의 피해로 기근과 아사자를 발생케 했을 뿐만 아니라 전야의 황폐를 가져왔다. 더욱이 자연재해에 대해 지배층이 장기적인 방지책이나 사후 수습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무능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국민들의 불신을 촉진시켰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기근의 규모나 참혹상이 감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구제활동은 오히려 점차 축소되어 갔다.

더욱이 통치기구 자체의 문란은 조선조의 재정위기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조선후기 백성들은 각종 자연재해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채, 지방관과 그들을 보좌하는 향리 층들은 가렴주구와 수탈행위로 이미 빈곤상태에 있는 농민들을 막다른 궁지로 몰고 갔다. 이들의 조세수탈행위는 19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으며 결국 가혹한 착취에 따른 농민 경제의 극한적인 악화는 이들의 자각에 따른 의식의 성장과 함께 농민저항의 기반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농민봉기를 경기도 지역의 민란으로 국한해 보자면 1862년 10월의 광주민란을 시발로 1876년 12월 파주에서는 명화적이 출현해 금천군의 상납전을 약탈한 사건, 1885년 2월에는 여주에서 퇴직한 아전들과 농민들이 함께 과다한 세금을 악랄한 방식으로 징수한 현감을 징치하고자 관아를 점령하고 불태웠으며 옥을 부수고 죄수를 석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1889년 10월에는 수원에서 전 승지와 군수의 가렴주구가 원인이 되어 수백 명의 농민들이 관리의 집을 습격해 부수는 등 민란이 일어났으며 이듬해인 1890년에는 안성에서 읍민이 군수의 탐학에 대한 민소를 하기 위해 통문을 돌려 무리를 모으는 취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891년 6월에는 수원 화산의 장헌세자와 정조의 능에 주둔하는 현륭원 군이 봉기하여 능참봉의 탐학과 토색질을 규탄하였고 1893년 인천에서도 관속인 아전들이 주동이 되어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는 등 민요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는 개성에서 수령의 과도한 탐학에 대해 현감과 농민이 봉기하여 관아와 양반의 집을 부수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9월 18일 해월의 총기포령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의 열기가 경기도 지역까지 전파되기에는 아직은 너무 먼 거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학조직의 수장인 해월 최시형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해월 최시형은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의 뒤를 이은 2대 교조로 낮은 신분 출신으로 글을 배운 적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해월은 그의 인품으로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능력이 있어 그는 동학조직의 절대적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해월의 인품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베틀을 짜고 있는 서 씨의 며느리를 ‘한울님’이라고 가르치고 방문하는 객도 한울님이 오신다고 했으며 아이들을 때림은 천주를 때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 위험한 피신행각 중에도 나무를 심고, 새끼를 꼬았으며 이사를 할 때도 사용하던 살림살이를 모두 두고 떠나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하면 이사처럼 편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런 해월은 초기 고부지방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자 반대를 했다. 그에게는 스승인 수운 최제우로부터 받은 도를 지켜야 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고 고부에서의 봉기는 자칫 전체 동학조직에 큰 위험이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전주성 입성과 전주화약으로 귀결되었지만 곧 이은 일본군과 청군의 침입과 이에 대한 대항이 절실해 졌고 드디어 농번기철이 지난 9월 18일을 기해 총기포 명령을 내린다. 더 이상 국가의 위기를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해월은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를 기치로 전국의 동학도들의 총궐기를 명한 것이다. 이에 경기도 지역의 동학도들 역시 동참하게 된다.

임형진(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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