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 민정기의 ‘벽계구곡’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 벽계구곡(檗溪九曲)이라는 계곡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여름철이면 피서지로 찾는 계곡이라서 아주 유명해요. 이 계곡에 흐르는 물은 통방산 삼태골에서 발원해서 노문리와 수입리를 거쳐 북한강으로 흐른답니다. 숲도 그만이고 계곡 또한 매우 수려해서 예부터 ‘물길 80리, 산길 50리’라고도 했고요.

구곡(九曲)이라고 했으니 아홉 개의 계곡이겠죠? 네 맞아요. 여기는 작은 폭포들이 많아서 자연스레 물웅덩이 같은 ‘소(沼)’가 많을 뿐만 아니라 물이 산허리를 굽이쳐 흐르는 S자 계곡들 때문에 아홉 계곡에 이름을 붙여 불렀답니다. 제1곡 외수입(바깥 무드리), 제2곡 내수입(안무드리), 제3곡 형지터(이제거의 옛터), 제4곡 용소, 제5곡 별소, 제6곡 분설담, 제7곡 석문, 제8곡 속야천(속샛부락 앞을 흐르는 내), 제9곡 일주암(갈문부락의 선바위)이 그것이에요.

1980년대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동인에 참여했던 화가 민정기는 1989년 무렵에 서울에서 양평으로 이주했어요. 처음부터 그는 서종면에 예술둥지를 틀었죠. ‘서종사람들’이라는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이 있는데 한동안 그 모임의 대표를 하기도 했고, 어쨌든 그는 양평으로 이주한 예술가들 중 선구적인 작가여서 그 후 많은 예술가들이 양평으로 이주하게 되는 동기를 제공했죠.

그런 그가 서종면을 에둘러 흐르는 벽계구곡을 화제로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해요. 다만 우리는 그의 ‘벽계구곡’이 여타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비교해서 독특한 화풍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무엇이 그의 작품을 독특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

첫째, 우선 옆으로 긴 그림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로로 길게 그린 그림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옛 화가들은 두루마리 화첩에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치면서 그림을 그렸던 것이죠. 세계관을 인식하는 방식이기도 한 이런 유형은 ‘걷기’라는 관찰자적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둘째, 그는 그가 본 것을 마치 거대한 하나의 풍경으로 표현했어요. 그는 그가 그리려는 풍경을 직접 답사하면서 공간으로 인식하기를 즐기는데, 이것은 대동여지도가 22첩으로 구성된 절첩식 지도이듯이 한 첩 한 첩 구성해 전체를 보려는 미학적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은 어디 한 군데를 집중해서 보아도 좋고 전체를 보아도 좋습니다. 풍경의 원근과 상관없이 이곳저곳 사방팔방 시방으로 흩어져서 구경해 보는 것이지요.

꽃구경 가는 계절이에요. 산으로 들로 강으로 어딜 가든 꽃과 더불어 풍경 보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그 풍경의 세목뿐만 아니라 그 세목들의 전체를 또한 보기를 권유합니다. 그래야 한 세계의 풍경을 사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정책개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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