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진달래는 서울에서도 야산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화전(花煎) 부꾸미까지는 아니어도 꽃을 입에 넣으면 약간 달착지근한 맛이 감돌던 기억도 새롭다. 벚꽃 필 때면 소풍 장소로 초등학생들 행렬이 이어진 창경궁에 이르는 길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벚꽃놀이를 위해 가로수에 매단 등불로 거리는 온통 잔칫집 분위기였다. 일제강점기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건립과 더불어 식재된 벚나무들은 왕궁복원 차원에서 모두 제거되었다.
동대문에서 종로 5가에 이르는 길가에는 차도 쪽으로 작은 노점의 꽃가게가 이어져 행인의 눈을 즐겁게 했다. 언제가 사라져 서운했는데, 길 건너 충신동 쪽으로 옮김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혜화동 교차로를 지나 복개한 구 서울대학교를 지나 동대문의 헌책방이며 종로를 걸으며 꽃 시장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시선을 멀리해 수려한 산세를 뽐내는 당당한 인수봉이며 도봉을 바라본다. 혜화동에서 혜화문을 벗어난 성 밖은 성북동과 삼선동으로, 예전엔 고양 군에 속했다.
인간의 수명이 한계가 있듯 각 민족이 세운 왕조의 수명은 대부분이 3백년 내외이다. 서구 학자들은 인류역사상 예를 찾기 힘든 5백년 내외를 견지한 우리의 고려와 조선의 두 왕조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굴절된 시각인 일본 식민주의사관에선 이 같이 긴 왕조를 마치 썩기 직전의 고인 물인 양, 변화와 발전이 없는 정체(停滯)된 사회였다고 폄훼한다.
그러나 한국동란 이후 미국의 사회학자들을 비롯한 국내외 학자들은 견해가 달랐으니 그 같이 오려 견지한 힘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무력에 의한 지배가 아니며 우리 땅에서 성숙한 불교와 조선성리학이 이를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의견을 같이하다. 이들은 더 이상 외제(外製)나 외래사상이 아닌 우리 손으로 키우고 완성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서구의 기독교가 탄생지를 떠나 지중해로 들어가 세계종교로 성장한다. 마찬가지로 원효와 의상 및 퇴계와 율곡 및 우암 등 우리 선조들은 인도와 중국에서 싹튼 붓다와 공자의 가르침을 적극,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천착(穿鑿)해 심화, 발전시킨 점에서 위대성이 드러난다.
위대한 사상은 시공의 틀을 벗어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와 조선왕조는 물론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한강 그 문명의 젖줄의 몫과 역할은 지대하다. 이를 껴안고 있는 경기지역의 역할은 실로 지대하며 큰 역할을 한 분들이 한 둘이 아니다. 허공에 시선을 두니 불현 듯 조선 후기를 사셨던 다산(茶山)과 추사(秋史)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린다.
두 분은 탁상공론(卓上空論) 아닌 실사구시(實事求是)로 민초들의 삶의 질적 향상 등 구체적인 시무책을 제시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닮은 점으론 애민(愛民), 차가운 지성과 따듯한 마음으로 대변되는 학예(學藝)를 아우름, 적지 아니한 시련 등을 들게 된다. 맹자(孟子)도 언급했듯 큰일이 주어진 이들에겐 강한 쇠를 위한 담금질 같이 시련과 고통은 성장통(成長痛)이자 필수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세상사가 모두 뜻대로 되면 과연 행복할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지면 늘 변함없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과연 있는가. 당나라의 대시인인 시선(詩仙) 이백(701-762)은 ‘장진주(將進酒)’에서 “하늘이 날 낳은 것은 반드시 쓸 곳이 있어서다”라 읊었다. 물론 우리가 모두 대통령이나 빌게이츠일 수는 없다. 다만 토끼면서 호랑이인 양, 호랑이가 자신을 토끼로 여김은 분명한 잘못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자신에게 불확실한 한두 가지가 전부인 양 강요함은 아닌지.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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