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나를 찾는 여정

우리는 늘 너무 많은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사실 매일 같이 접하는 그 무수한 이미지가 결국 미술이다.

또한 사람들은 직접 미술 작품을 만들지 않더라도 미술적 행위라고 부를 만한 일을 날마다 한다. 자신의 집안 인테리어에서부터 시작해 소소한 물건을 하나 고르더라도 디자인과 색상을 따져보는가 하면 무엇보다도 그날그날의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화장을 하는 일, 남의 옷차림과 치장에 관심을 기울이며 은밀히 관찰하는 일, 카페나 음식점의 실내장식과 분위기 등에 대한 품평을 비롯해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을 때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일 모두가 실은 광의의 미술 감상이자 체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미술과 충분히 낯을 익히고 있으며 그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고 실생활에서 이미지 제작행위를 적극적으로 감행하고 있다. 다만 그러한 일련의 행위를 결코 미술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이 문제다.

미술이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만 존재한다고 여기거나 미술을 전공한 전문가들만의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미술은 특정 전시 장소에만 걸려있거나 놓여있지 않다. 오히려 전시장 밖에 너무 많은 이미지들이 바글거린다. 그것들을 날카롭고 정치하게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그 이미지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미술 감상이자 공부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술을 전공했느냐가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미지를 건성으로 보아 넘기지 않고 관심 있게 응시하고 이를 곰곰 생각해보면서 그 이미지를 책을 읽듯이 독해하고, 그런 맥락에서 미술적 행위를 하고 있느냐를 질문해야 한다.

오늘날 미술은 정해진 소재를 동일한 방식으로 재현하거나 아름다움이란 것을 강박적으로 구현하는 그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이른바 현대미술이란 동시대의 보편적인 미술개념을 회의하고 불식시키는가 하면 미술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결국 미술이란 ‘미술이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질문하는 일’이다.

미술이라 불리는 개념을 문제시하고 동시대의 시각 환경을 이루는 이미지들을 독해하면서 나를 둘러싼 사물과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 그것이 미술이다. 일상의 사물과 세계를 새롭고 낯설게 보여주는 것이며 상투적인 사고를 전복시켜주는 것이 좋은 미술이다.

그것은 기존의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시선으로 사물과 세계를 보는 안목과 감각을 확장시켜나가는 일이다. 궁극적으로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온전히 통찰하고자 하는 것이며 진정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은 상식적이고 규범적인 모든 명명(命名)의 체계를 흔들고 교란하는 행위다. 그것을 행하는 작가란 존재는 우리에게 새롭고 낯선 존재를 보여주는 이다.

미술은 전시장의 안과 밖에서 왕성하게 번식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열심히 사유의 대상으로 먹어대야 한다. 그렇게 먹어대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를 둘러싼 세계와 사물을 진정으로, 제대로 알고 싶기에 그렇다. 그래서 타자에 의해 훈육되고 길들여지고 학습된 나를 버리고 오롯한 주체가 되고 싶기에 그럴 것이다.

나라고 믿었던 미망을 지우고 참된 나를 찾는 일이다. 불가에서는 나라고 부르는 나를 버려야만 비로소 보이는 나를 찾는 일을 일러 수행이라고 한다. 라캉식으로 말하면 ‘나는 여기에 없다’. 그래서 자기다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이 수행이다.

자기 참모습에서 살자는 것이 수행의 선(禪)인 것이다. 선은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일컫는다. 번뇌 망상을 제거시켜 때가 묻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를 견성이라고 한다.

수행자는 그 생명 같은 화두 하나를 들고 덤벼들어 공부한다. 왜 공부하는가? 수행하는가? 적멸락(寂滅樂), 그러니까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미술을 제대로 향유하고자 하는 공부의 의미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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