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는 9ㆍ11테러와 다른 人災-
9ㆍ11 테러는 전쟁이었다. 외세(外勢)에 의한 공격이었다. 그날 오전 8시 45분,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로 비행기가 돌진했다. 납치된 여객기였다. 18분 뒤 다시 남쪽 건물을 비행기가 받았다. 역시 납치된 여객기였다. 37분 뒤, 이번에는 워싱턴에 있는 펜타곤-국방부-으로 여객기가 날아들었다. 다시 15분 뒤,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또 다른 여객기가 추락했다. 그 75분은 미국민에게 전쟁이었다. 미국 본토가 공격받은 사상 최초의 도발이었다.
세월호는 4월 15일 오후 8시 30분 인천항을 출발했다. 수학여행에 들뜬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타고 있었다. 공격을 할 일도, 공격을 받을 일도 없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을 태운 배가 갑자기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선장이 급하게 방향을 틀었고, 불법 과적된 화물이 쏠리면서 배가 넘어갔다. 멀쩡한 날씨에, 멀쩡한 여객선이 빚은 어처구니 없는 사고였다. ‘기독교-이슬람’ 전쟁이었던 9ㆍ11 테러와는 눈곱만큼의 공통점도 없다.
두 사고의 위기 대처는 더 판이하다. 비행기 화염 속에 산화한 사람도 있다. 80층에서 뛰어내린 사람도 있다. 대다수는 무너진 빌딩 밑에서 숨졌다. 사람들은 안내에 따라 비상통로를 이용했고, 건물은 내진 설계대로 무너졌다. 하지만 2천792명이 숨졌다. 그 후로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그 순간을 얘기했다. 빌딩의 설계자는 TV에 나와 울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그(투신자)는 뛰어내리는 것이 더 행복했을 것이다’.
세월호의 2014년 4월 16일 9시 30분이 공개됐다. 배는 45도만 기울어진 상태였다. 3층부터 시작되는 객실은 물에 잠기지 않았다. 이때해경이 진입했으면 모두를 살릴 수 있었다. 9시 45분, 배가 62도로 기울었지만 여전히 객실의 80%는 물 밖에 있었다. 이때 진입했어도 대부분을 살릴 수 있었다. 10시 17분, 배가 108.1도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이때도 카톡을 보낸 학생은 있었다. 여전히 해경은 진입하지 않았다. 더 이상 삶의 신호는 없었다.
믿고 말고 할 분석이 아니다. 이번 사고를 수사하고 있는 검ㆍ경 합동수사본부의 분석이다. 수사본부가 핸드폰 문자기록과 각종 자료를 근거로 시뮬레이션까지 동원해 도출한 결론이다. 사고 초기부터 우리는 그렇게 상상했다. 아이들은 살아 있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추측만으로 입 밖에 내기엔 너무 참혹한 상상이었다. 이제 그 상상이 검찰에 의해 재연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정부 책임은 이렇듯 확정적이고 분명하다.
그런데 왜 9ㆍ11 테러를 세월호에 섞어 넣지 못해 안달인가. 9ㆍ11 테러는 재난 예방에 실패한 사고다. 세월호는 재난 예방과 재난 구조에 모두 실패한 사고다. 세월호 참사에 9ㆍ11 테러를 끌어다 붙일 하등의 공통점이 없다.
이러면 안 된다. 9ㆍ11과 비교해 엉터리 논리를 만들고, 그 논리를 근거로 세월호 책임을 돌리려 하면 안 된다. 슬퍼서 우는 국민에게 ‘9ㆍ11때 미국민은 차분했다’며 훈계하면 안 되고, 책임을 얘기하는 국민에게 ‘9ㆍ11 때 미국민은 똘똘 뭉쳤다’며 억지 쓰면 안 된다. 세월호에 우는 국민을 ‘선동하는 정치꾼’으로 몰면 안 되고, 책임을 추궁하는 국민을 ‘미개한 국민’으로 몰면 안 된다. 믿기 어렵게도 이런 억지가 지금 정부기관장 입에서 나오고 있다.
원칙 없는 소신이 권력과 맞닿으면 맹수보다 잔인해진다더니…. 지금 우리가 그런 몰골을 보고 있는 듯 싶다.
[이슈&토크 참여하기 = 국가보훈처장, 그 입 다무시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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