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 그역사를 찾아]15.갑오농민전쟁(동학) 유적지, 남양주

혁명의 불씨 살린 흥선대원군ㆍ동학정신 이끈 다산 정약용 魂 서려

사실 남양주에는 동학농민전쟁과 직접 관련된 특별한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전쟁 유적지로서 남양주를 맨 처음에 소개하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바로 남양주에 다산 정약용과 흥선대원군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다산의 묘소는 생가 뒤편 언덕에 있으며, 대원군의 묘소는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속에 있다.

갑오년의 동학농민전쟁은 이전의 농민항쟁과 확연히 달랐다. 민씨 정권은 물론 의정부 고위관료로부터 지방 수령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동학농민군의 엄청난 힘에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 민씨 정권에 놀아나던 고종은 동학농민군의 봉기 소식을 듣자 서둘러 청나라에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를 요청하였다. 외국의 군대를 빌려 농민군을 진압하려는 정부의 얼빠진 결정으로 일본군대를 불러들였으며, 국토를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격동의 순간에 동학농민군의 저력에 주목하고 이들과 관계를 맺었던 인물이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다.

1894년 6월 21일(음), 일본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여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다음날 고종에게 “해군과 육군의 사무는 대원군에게 진명하여 채결한다”라는 전교를 발표하도록 하여, 대원군을 집정으로 세웠다. 일본이 아산만 부근의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함대를 기습 공격한 7월 1일, 대원군의 집정 아래 개화파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개화파 정권을 세워 갑오개혁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일본이 대원군을 옹립한 것은 “일반 백성들의 인기가 완전히 대원군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주화약 때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에 “국태공(國太公:대원군)에게 국정을 맡기는 것은 민심이 원하는 바”라는 조항과 “동학교도로서 죄 없이 살육되거나 투옥된 자는 모두 신원 할 것”이라는 조항이 들어 있다. 이에 화답을 하듯 대원군은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혀 있던 남접의 대부 서장옥을 비롯한 동학도를 석방하였을 뿐 아니라 석방된 동학도 두 명에게 관직을 주어 동학도들의 마음을 샀다.

또한 대원군은 손자 이준용과 의논하여 농민군 진영에 자신의 심복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이 결과 남접 농민군과 대원군 사이에 ‘청병과 합세하여 왜적을 진멸하려고’ 하는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 “감옥에서 석방된 서장옥은 대원군의 집에 몰래 숨어서 ‘군대를 갖춰 북상하여 함께 국난에 맞서자’라는 대원군의 밀서를 농민군에게 전했다”는 소문을 싣고 있다.

주목할 것은 2차 봉기를 가장 먼저 결행했던 지도자가 서장옥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전봉준의 재봉기는 대원군이 보낸 밀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밀사가 가져온 정보를 통해 농민군 지도부는 일본의 속셈과 개화파에 더 이상 기대할 만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과 농민군의 은밀한 움직임은 일본군의 정보망에 속속 걸려들었다. 일본이 파악한 이들의 계획의 전모는 이렇다.

첫째, 밀사를 평양에 파견하여 청병의 대거 남하를 촉진할 것.

둘째, 동학당을 선동하여 경성(서울)으로 끌어들일 것.

셋째, 첫째와 둘째 수단의 의거하여 일본 군대를 협격하여 그들을 경성 밖으로 쫓아낼 것.

넷째, 개호당의 주요인물인 김홍집, 김가진, 유길준 등을 암살할 것.

다섯째, 국왕, 왕비, 세자를 폐하고 이준용을 왕위에 즉위하게 할 것.

여섯째, 사변에서 공로 있는 자 및 모모를 기용하여 새 정부를 조직할 것.

이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원군과 농민군이 목표로 삼은 계획이 무엇인지는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전봉준이 체포되어 당국과 미나미 고시로의 심문을 받을 때 “내 위에 서서 우리들을 사주한 자는 결코 없다”며 대원군과의 관계를 강력하게 부인했던 반면, 김개남은 “우리들이 하는 바는 모두 대원군의 밀지에 의한 것이다”라며 대원군과의 관계를 시인하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갑오농민전쟁은 30여 년 전 삼남을 휩쓸었던 1862년의 농민항쟁과도 그 규모나 강령, 전술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실학자로 불리는 선대의 진보적 학자들의 이론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초의(草衣)는 정다산의 시우(詩友)일 뿐 아니라 도교(道交)이다. 다산이 유배로부터 고향으로 가기 직전에 『경세유표』를 밀실에서 저작하여 그의 문생 이청과 친승 초의에게 주어서 비밀히 보관 전포할 것을 부탁하였는데, 그 전문은 중간에 유실되었고, 그 일부는 그 후 대원군에게 박해 당한 남상교, 남종삼 부자와 홍봉주 일파에게 전하여졌으며, 그 일부는 그 후 강진의 윤세환, 윤세현, 김병태, 강운백 등과 해남의 주정호, 김도일 등을 통하여 갑오년에 기병한 전녹두(전봉준) 김개남 일파의 수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이용하였는데, 전쟁 끝에 관군은 정다산 비결이 녹두 일파의 ‘비적(匪賊)’을 선동하였다 하여 정다산의 유배지 부근의 민가와 고성사, 백련사, 대둔사 등 사찰들을 수색한 일까지 있었다.」

이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는 최익한(1897~?)이 지은 『실학파와 정다산』(1955)에 서너 차례 소개되고 있다. 최익한은 한말 영남 유림의 거두로서 ‘파리장서’ 초안자로 널리 알려진 면우 곽종석 문하에서 수학했던 인물이다. 그는 1938년 1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동아일보> 에 <『여유당전서』를 독(讀)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했을 정도로 다산에 정통했던 대학자였다.

최익한은 앞에서 소개한 이야기가 『강진읍지』에 실린「명승 초의전」에 실려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강진읍지』에 나오는 인물들은 1894년 1차 기병 때 강진과 해남에서 활약한 농민군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전봉준이 『경세유표』별본을 입수했다는 것은 사실로 판단된다. 참고로 동학농민군 후손들의 증언이 실려 있는『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에 전봉준에게 『경세유표』별본을 전달했다는 윤세현(1856~1930)의 손자 윤건하 씨의 증언이 들어 있다. 윤세현은 전라도 강진 일대 6개 군을 관할하는 책임을 맡아 ‘육도씨’라 불렸던 대접주로 갑오년 농민전쟁에 참전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인물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다산 정약용의 대표 저작은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이다.

“대개 털끝만큼 작은 일이라도 병폐 아닌 것이 없으니, 오늘날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어찌 충신과 지사가 팔짱을 끼고 방관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처럼 단호한 머리말로 시작되는 『경세유표』에 담긴 개혁안을 정리해 보면 ①관직체제의 전면개편. ②신분과 지역의 차별을 배제한 인제등용. ③자원에 대한 국가 관리제 실시. ④토지제도의 개혁. ⑤조세제도의 합리화. ⑥지방 행정조직의 재편 등이다. 아울러 다산의 개혁사상을 선명하게 엿볼 수 있는 글로 <원목(原牧)> , <전론(田論),> <탕론(湯論)> 을 꼽을 수 있다. 셋 모두 짧지만 핵심을 명쾌하게 드러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생계수단을 균등하게 만들어 다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자는 참된 군주와 목민관이다. 백성들의 생계 수단을 균등하게 만들어 다 함께 살 수 있게 하지 못하는 자는 참된 군주와 목민관이 아니다.”

다산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삼았던 것은 토지문제였다. 아울러 다산은 농사짓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하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과 토지의 소유 및 노동에 따른 분배 문제를 바탕으로 하는 여전법(閭田法)을 주창했는데 이것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놀라운 제도이다.

<탕론> 은 특히 혁명적이다. 여기서 다산은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저항은 너무나 정당한 것’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천자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하늘에서 내려와 천자가 되었는가? 아니면 땅에서 솟아나 천자가 되었는가? …천자는 뭇사람이 추대하여 된 자다. 그러나…어질지 못한 천자는 끌어내려야 한다.” 이처럼 다산은 이미 150년 전에 백성들이 임금을 뽑을 수 있는 현대의 선거와 같은 제도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다산의 개혁사상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에게 전해져 새로운 정치개혁을 구상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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