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 그 역사를 찾아] 22.안성의 동학혁명운동 진압에 앞장선 이두황

동학군 토벌ㆍ국모 시해사건 가담… 친일 반민족 행위로 악명 떨쳐

‘안성’ 하면 우선 안성맞춤과 바우덕이가 떠오른다.

안성에서 맞춘 유기(鍮器, 놋그릇)는 주문자의 마음을 매우 흡족하게 한다는 안성맞춤, 15세의 어린 여성으로서 남사당패의 우두머리가 되어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던 예인 바우덕이.

여기에 안성은 미륵불이 많아서 미륵(彌勒)의 고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미륵은 석가모니 사후 56억7천만년 후에 나타나 석가가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이다.

그런데 안성에 유독 미륵불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찍이 안성은 교통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관계로 많은 전쟁이 벌어졌던 지역이다.

신라 말 혼란기에 기훤(箕萱)·궁예(弓裔)세력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고려 때는 몽골이 쳐들어와 죽주산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민중들이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갈망하며 곳곳에 미륵을 세웠던 것은 아닐까.

■ 안성 죽산 지역의 동학농민운동과 왜무덤 전설 

 동학이 언제 안성에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안성과 동학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성은 기본적으로 서울ㆍ경기와 하삼도(下三道; 충청·전라·경상)를 잇는 곳이다. 즉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였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교류가 잦았던 안성이고 보면 동학이 일찍이 안성 고을에 전해졌을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동학이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부르짖었으니 오래도록 미륵불의 출현을 고대했던 안성 지역 민중들에게는 그야말로 메시아(Messiah; 구세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안성 지역에서 동학에 관한 기록으로는 1893년 3월 보은집회에 안성접(安城接)에서 300여명, 죽산접(竹山接)에서 400여명이 참여하는 것이 보인다. 이때 집회에 참여한 경기도 동학교도가 2천여명이었는데, 그 중 안성교도가 35%를 차지할 정도로 이 지역의 동학교세가 상당하였다.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벌어졌을 때 안성 지역에는 두 개의 포(包)가 있었고, 접주는 정경수(鄭璟洙)와 임명준(任命準)이었다. 안성의 동학군은 북접의 손병희(孫秉熙) 산하에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정경수의 포군이 북접 농민군의 선봉부대에 편성되어 활약하였다.

안성의 동학교세가 막강해지자 조선 정부군은 물론 일본군이 동원되어 동학군 탄압에 나서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안성의 동학군은 안성과 진천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각종 물건을 빼앗아갔다. 10월 말께에도 “죽산에 동학도가 많아 그 수효를 헤아리기 어렵다”며 원병을 요청하는 정부군의 보고를 보면 동학 세력이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동학군 활동과 관련하여 이 지역에는 ‘왜무덤 골짜기’ 일화가 전해진다. 공주 우금치 전투 후 안성군 일죽면 능국리까지 올라온 동학군 다섯 명이 일죽면 내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2명을 살해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오히려 동학군 5명 정도면 혼자서도 능히 처치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능국리로 향하였다. 이에 동학군은 일본군에 기습을 가하여 살해하고, 그 목을 잘라 칼에 꽂고 춤을 추는 등 기세가 등등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이 대규모로 몰려오자 동학군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고, 일본군은 살해된 동료를 능국리 골짜기에 묻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골짜기가 왜무덤 골짜기로 불리고 있다는 전설만 존재할 뿐 실상 그 곳이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다. 능국리의 분동ㆍ노동ㆍ능동ㆍ국동 등 네 개 마을의 어르신들도 왜무덤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한다.

■ 동학교도를 진압하라… 이두황을 죽산부사로

동학군이 경기도 죽산과 안성에서 기세를 올리자 조선정부는 1894년 9월10일 장위영(壯衛營) 영관(領官) 이두황(李斗璜)을 죽산부사, 경리청(經理廳) 영관 성하영(成夏泳)을 안성군수에 각각 임명하여 이들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성하영은 군수로 부임한 후 동학 접주 유구서(兪九西)ㆍ김학여(金學汝)ㆍ김금용(金今龍) 등을 체포하여 목을 베는 등 동학군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안성군수에 부임하지 않고 지체하는 바람에 거꾸로 동학군에게 관아를 점령당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파면 당하였고 이어 홍운섭(洪運燮)이 군수로 임명되었다.

 한편 죽산부사 이두황은 부임명령을 받은 즉시 1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 용인에 이르러 동학교도 20명을 체포하였고, 그 중 우두머리인 이용익(李用益)ㆍ정용전(鄭龍全)ㆍ이주영(李周英)ㆍ이삼준(李三俊)을 양지현 네거리에서 효수하였다.

이어 죽산에 도착한 이두황은 동학 접주 우성칠(禹成七)ㆍ박만업(朴萬業)ㆍ박봉학(朴奉學)ㆍ이돈화(李敦化)ㆍ이진영(李臻榮) 등을 잇달아 잡아들였다. 그는 동학군을 체포하는 자에게 상금을 내렸고, 체포된 동학군을 공개된 장소에서 처형ㆍ효수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경계를 삼도록 하였다. 이 지역의 동학군은 토벌군을 피하여 충주ㆍ괴산ㆍ보은ㆍ논산 등지로 옮겨 다녀야만 하였다.

 이두황은 죽산부사로 있으면서 동학군 진압을 위해 설치한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의 우선봉장(右先鋒將)을 겸하게 되었고, 경기도뿐 아니라 보은ㆍ청주ㆍ천안ㆍ공주ㆍ해미ㆍ예산ㆍ부여ㆍ논산ㆍ남원ㆍ순천ㆍ광양 등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하여 1894년 9월10일부터 이듬해 2월18일까지 동학군 진압에 대한 기록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를 남겼다. 이두황이 죽었을 때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는 그의 약력을 소개한 끝에 “특히 동학당 난(亂)을 당하여 일본을 위해 진력한 공로는 국민이 영구히 망각하기 어려운 바이더라”라고 강조하였다.

■ 동학군 사냥꾼 이두황은 누구인가

이두황(1858∼1916)은 서울의 가난한 평민집안에서 태어났다. 1882년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의 말단직을 시작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수문장ㆍ훈련주부ㆍ첨정을 거쳐 1889년에는 흥해군수에 임명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 토벌의 임무를 띠고 죽산부사 겸 양호도순무영 우선봉이 되어 동학군과 많은 전투를 벌였다. 그 뒤 청일전쟁에도 참전을 자청하여 통역ㆍ정탐 활동을 하였고, 청군의 시체를 매장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그 공로로 양주목사에 승진하였고, 친일정권에서 군대가 만들어지자 훈련대 제1대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을미사변(乙未事變;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는 광화문의 경비를 맡는 등 친일에 적극 앞장섰다. 고종에 의해 대역죄인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동대문을 빠져나가 금강산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 뒤 동해안을 따라 부산까지 걸어가서 머리를 깎고 옷을 바꿔 입은 채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두황은 10년 넘게 하는 일 없이 일본을 돌아다니며 암살을 모면하였고, 1907년 사면령이 내려지자 귀국할 수 있었다. 친일파를 양성하려는 이토 히로부미의 보호를 받아 곧바로 중추원 부찬의(副贊議)가 되었고, 다음해에는 전라북도 관찰사(觀察使; 뒤에 도장관→ 도지사로 명칭 변경)에 임명되었다. 그는 도장관 재직 중 제국재향후원회 조선지회 전라북도 부회장 등 일본단체의 지부장도 지냈으며,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과 은사금을 받았다.

또한 일본 불교를 독실하게 믿은 나머지 장례도 화장으로 치르도록 유언하였다. 1917년에 발간된 『인물평론(人物評論)』에서는 그를 “조선인 도장관 중 최고령으로 젊어서는 객기가 넘쳤다. … 여색을 좋아하고 기생과 관계도 많으며, 누누이 도박으로 승패를 다툰다. … 그의 일생을 훑어볼 때 적어도 하늘이 내린 행운아라는 느낌이 든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학군 토벌대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후 숨어 지내다가 나중에는 일제 앞잡이로 살았던 이두황. 그는 현재 전라북도 전주시의 한 아파트 근처 야산에 잠들어 있다. 서울 출신인데도 묘역이 전주에 있는 것은 아마도 그가 죽을 때까지 전라북도 장관을 지낸 이력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친일파라는 굴레를 쓴 그의 묘비는 군데군데 훼손되거나 온갖 욕으로 덧칠해져 있고, 오늘도 묘역을 지나는 등산객의 따가운 눈총을 피할 길이 없다. 

김명우(문학박사, 경기문화재단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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