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경기도 의병 항쟁의 성지, 남한산성
“갑오세(甲午歲)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 거리다, 병신(丙申)이 되면 못 가리.”
민중들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함께 불렀던 노래 ‘갑오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리다. 갑오년(1894)에 조정의 부패를 척결하고 정치를 개혁하여 외세를 몰아내지 못하면, 다음해 을미년(1895)도 허송세월을 보내고 병신년(1896)이 되면 나라조차 지키기 어렵다는 민중들의 예측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을 찾았던 날은 몹시 더웠다. 칠월 하순, 장마철이고 평일인데도 관람객이 생각보다 많았다. 휴가철인데다 얼마 전에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기 때문이리라. 맨 처음 둘러본 것은 최근에 복원한 행궁이다. 새로 지은 건물 사이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눈에 들었다.
병자호란과 을미의병을 곁에서 지켜보았을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행궁의 고즈넉한 풍경을 담았다.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사업을 결정했다. 전라도에 관민의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관군과 합의했던 것이다. 중앙 정부도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갑오경장을 시행했다. 양반상놈을 갈라 차별하던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등 민들의 요구를 정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민중들의 마음을 사지 못했다. 그 배후에 일본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을미년(1895) 10월,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의 칼날에 죽임 당했다. 왕비를 잃은 고종은 일본군의 감시를 받으며 궁궐에 갇힌 처지가 되었다. 12월에는 단발령이 공포되었다. 고종이 제일 먼저 상투를 잘랐다. 이듬해 2월에는 온건개화파로 갑오경장을 주도했던 총리대신 김홍집이 대낮에 큰길에서 군중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었다. 이 무렵 명성왕후 시해사건에 가담했던 훈련대 대대장 이두황이 일본으로 도망갔다. 그는 동학농민군 토벌작전을 총지휘하여 패퇴하는 농민군을 보이는 대로 살육했던 토벌대장이다.
1896년 정월, 전국의 유생들이 총을 들었다. 매관매직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지만, 왕비를 살해한 일본인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예의의 나라 조선의 유생들에게 단발령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관군과 일본군의 토벌작전에서 겨우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전력을 숨기고 의병대열에 합류했다.
단발령을 공포한 다음날, 서울에 있던 김하락을 비롯한 구연영·신용희 같은 젊은 유생들이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화포군을 포섭하여 이현에 진영을 설치하고 안성 의병과 연합하여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했다.
병신년 정월, 이천의병들은 백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두 번째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다시 결집한 2천여 명의 의병들은 박주영을 새로운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1월30일 활동근거지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남한산성은 서울로 진공할 수 있는 최적의 요새였다. 산성에는 심진원이 이끄는 광주 의병이 벌써 진을 치고 있었고 이승룡이 이끄는 양근 의병도 합세하였다. 사기는 드높았다. 당시의 분위기를 의병장 김하락은 《진중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사방 산이 깎아지른 듯이 솟고 성첩이 견고하여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1만명이라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성중을 두루 살펴보니 쌓인 곡식이 산더미 같고 소금이 수백석에 달하고 무기도 구비되어 대완기(大琬器)가 수십문, 천자포·지자포도 역시 수십문, 천보총이 수백자루였고, 나머지 조총도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며 탄약 철환이 산더미 같았다. 여러 장수들은 군용이 유여한데다 진칠 곳마저 견고하여 몹시 기뻐하였다.”
경기도 의병들이 남한산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놀란 정부는 중앙병력을 급파했다. 친위대 1개 대포중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3월 초부터 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의병은 관군을 송파까지 추격하여 대포를 빼앗았다. 당황한 정부는 강화도를 지키던 병사 300여명과 일본군을 증파했다. 그래도 거듭 패배하자 최정예 혼성대대 병력을 남한산성으로 보냈다. 관군은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수차례 성을 공격했으나 의병의 강한 반격을 받고 물러섰다.
3월22일 새벽,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으로 관군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장 박준영이 낮에 병사들에게 수고한다며 술과 고기를 실컷 먹이는 잔치를 벌인 다음 모두 곯아떨어진 새벽에 성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박준영에게 광주 유수, 김귀성에게 수원 유수를 주겠다는 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대장들의 배반으로 의병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후퇴하기에 바빴다. 의병들은 후퇴하는 중에도 배신자를 처단했다. 김귀성은 이미 달아난 뒤였다. 박준영 3부자를 끌어내어 총살했다. 의병들이 성 밖으로 빠져나갈 때 관군들이 “빨리 달아나라. 일본놈을 만나면 죽는다”며 호송해 주었다.
이후 김하락은 이천 의병들을 이끌고 영남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연합전선을 펴고 활발하게 전투를 벌였다. 최후의 전투에서 두 발의 총탄을 맞은 김하락이 “왜놈의 손에 잡혀 죽느니 차라리 고기밥이 되겠다”며 강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이 도읍으로 삼은 때부터 천혜의 요새로 알려졌으며 조선시대에도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다. 1636년 겨울, 청태종이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병자호란이다. 임경업 장군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한 청의 기병부대는 엿새 만에 개성까지 진격했다.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 적군에게 막히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산성에는 1만3천의 병력과 충분한 군량미가 있었지만 땔감은 턱없이 부족했다. 달포 동안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청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텼다. 정월 26일,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되었고 왕세자도 포로가 되었다는 급보를 받았다. 같은 달 30일 항전을 포기한 인조는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이후 남한산성은 치욕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적의 공격에 함락되었던 곳이 아니다. 최강의 군대와 맞서 45일을 지켜냈던 항전의 성지였다.
드디어 수어장대다. 경기도 의병들이 행궁과 산성을 굽어보며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성한 수풀이 시야를 가리고 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마른번개와 천둥소리가 연신 요란하다. 발걸음을 바삐 옮겨 성의 남문인 인화문 앞에 섰을 때는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혔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한참 동안 ‘지화문(至和門)’이라 쓰인 편액을 바라보았다. 화(和)란 곡식[禾]과 입[口]을 합한 글자다. 나눔을 실천하는 것[和]이 평화[和]에 이르는[至] 문이다. 동학은 밥을 혼자 먹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 나누어 먹으라고 가르쳤다. 1779년(정조3) 8월 정조가 남한산성을 찾아 서장대에 올라 군사훈련을 지휘했다. 이때 정조는 신료들에게 음식을 내리고 병자호란 때의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성이 …천험(天險)인 땅이라 하겠다. 참으로 급할 때에 믿을 만하다마는, 당초에 한번 적과 결전하지 못하고 마침내 성이 떨어지는 치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지리(地利)를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다. …지리와 인화(人和)가 다 그 마땅한 것을 얻었다면 어찌 청병을 걱정하였겠는가?”
정조의 탄식처럼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천시(天時)와 지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인화였다. 정조는 병자호란 당시 남문을 맡았던 구굉이 여러 차례 출병하여 많은 적을 무찔렀던 사실과 북문을 맡았던 김류가 적에게 속아 출병했다가 군사들 대부분 잃었던 사실을 신하들에게 이야기했다.
1779년 6월에 수어사 서명응이 남한산성을 개축 보수하면서 동문을 좌익문(左翼門), 서문을 우익문(右翼門), 남문을 지화문, 북문을 전승문(全勝門)으로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실려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 볼 때 지화문을 포함한 4대문의 이름은 정조가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맹자가 말했다.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고.
을미의병이 일어난 지 118년,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녹록찮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며 평화헌법을 제정했던 일본은 얼마 전 헌법을 뜯어고쳐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로 선언했다. 120년 전 청일전쟁 때 패전했던 중국의 군비증강은 사뭇 위협적이다. 러시아의 군사력도 이에 못지않다. 미·일·중·러 초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한반도는 남북이 갈라져 여전히 군사대결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선택할 것은 명확하다. 서둘러 남북이 화합[人和]하고 협력하는 일 뿐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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