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외세ㆍ만민평등 외치던 민초들의 불꽃… ‘양지’에 잠들다
양지면사무소를 찾아 양지 관아터를 물어보았더니, 양지 출신의 면장님이 “현재 양지면주민자치센터”라고 알려주셨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양지현의 고지도를 보면 양지현의 관아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관아와 관련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양지면지』에 실린 1986년에 촬영한 흑백사진 1장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동헌 건물의 처리문제를 놓고 문화재 전문가에 자문을 구했을 때 강력하게 보존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무슨 까닭인지 전문가의 조언도 무시하고 결국 유일하게 남아 있던 건물을 헐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30년 전에 벌어진 일이다. 당시 우리 사회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은 이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여직원이 친절하게 안내해 준 방향으로 잠시 걸으니 ‘양지의 중심 교동’이라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서 있었다. 교동이란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홍살문이 서 있는 양지향교는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향교와 관아터 사이 언덕에 서 있는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는 갑오년 동학농민군들의 희망과 절망을 지켜보았을 유일한 생명체였다. 향교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양지면주민자치센터가 바로 양지관아가 있던 곳이다.
1907년에 개교한 양지초등학교는 아이들 웃는 소리로 가득했다. 학교 앞에 좌우로 뻗어 있는 길은 위로는 수원으로 이어지고 아래로는 충청도 진천과 죽산으로 이어지는 50번 국도이다. 이곳에서 120년 전 반봉건 반외세의 깃발을 들었던 4명의 동학농민군이 처형되었다.
갑오년 당시 양지에서 활동했던 동학군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충청도 서산 출신의 한 동학 접주가 전해주는 증언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입도한 지 불과 며칠에 전하고 듣고 하여 동학의 바람이 사방으로 퍼지는데, 하루에 몇 십명씩 입도를 하곤 하였습니다. 마치 봄잔디에 불붙듯이 포덕(布德)이 어찌도 잘 되는지 불과 한 두 달 안에 서산 한 군이 거의 동학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첫째 시운(時運)이 번복하는 까닭이요, 만민평등을 표방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재래로 하층계급에서 불평으로 지내던 가난뱅이, 상놈, 백정, 종놈 등 온갖 하층계급은 물밀 듯이 다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있어서 제일 인심을 끈 것은 커다란 주의나 목적보다도, 또는 조화(造化)나 장래 영광보다도 당장의 실익 그것이었습니다.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여천이라는 주의 하에서 상하귀천 남녀존비 할 것 없이 꼭꼭 맞절을 하며, 경어를 쓰며, 서로 존경하는데서 모두 마음으로 기뻐하며 성심으로 섬기게 되었고, …그때야말로 참말 천국(天國) 천민(天民)들이었지요.” (홍종식,「동학란실화」『신인간』34호, 1929.4)
수운 최제우가 1860년 경주에서 동학을 창도한 이후 동학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퍼져나갔다. 1871년 최초의 동학혁명으로 새롭게 평가받는 영해동학혁명(이필제란) 이후 관의 집요한 탄압을 피해 강원도와 경상도 산간 지역으로 은밀하게 포교활동이 이루어졌다.
동학이 경기도에 널리 전파된 것은 1880년 이후부터였다. 1883년에는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의 스승으로 알려진 수원 출신의 서장옥이 입도하였고, 1886년에는 경기도 지역의 교도들이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던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경기도에도 교도들의 수가 꾸준하게 늘었던 것으로 보인다.
3월20일 무렵, 양호선무사 어윤중이 탐지한 바에 따르면 보은 장내리 집회 장소에는 커다란 척양척왜기가 세워져 있었으며, 각 지역을 표시하는 깃발도 내걸려 있었다. 거기에는 용인을 표시하는 듯한 깃발도 함께 나부끼고 있었다. 보은 집회 당시의 동태를 기록한 『취어(聚語)』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3월26일, 저녁 8시 경 수원과 용인 등지에서 300여명의 교도들이 추후에 왔다.”
“4월2일 오후 4시부터 4월3일 10시까지 무리들 가운데 해산하여 돌아간 자들은 경기 수원접 840여명, 용인접 200여명… 이라 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골수 친일파 송병준(宋秉晙)이 1894년 4월까지 양지 현감을 역임했다는 사실이다. 정미칠적으로 민중들의 원성을 받았던 송병준은 이완용과 더불어 친일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송병준이 양지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지역민들을 못살게 굴었을 것은 불을 보듯 한 일이다.
1894년 가을, 동학농민군이 2차 기포했을 때 용인지역의 동학군은 양지를 중심으로 기포했다. 용인은 서울과 가까웠던 만큼 이 지역 농민군들의 활발한 움직임이 포착되자 조선왕조도 이를 커다란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조정에서는 제2차 농민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인 9월10일에 무관들인 장위영 영관 이두황과 경리청 영관 성하영을 죽산부사와 안성군수에 임명하여 이 지역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동학농민전쟁에 참전했던 오지영의『동학사(東學史)』에 따르면 양지의 동학농민군은 해월 최시형의 9월18일 총기포령이 내리기 이전에 고재당(高在棠) 접주를 중심으로 양지에서 기포하여 활동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894년 9월10일, 장위영 영관 이두황과 경리청 영관 성하영을 죽산부사와 안성군수에 임명하였고 9월21일에는 양호순무영을 설치하고 신정희를 도순무사로 삼았다.
서울 군대를 이끌고 용인에 도착한 이두황은 일본군 하라타[原田] 소위가 지휘하는 1개 소대 병력과 합류하여 동학군을 색출하였다. 당시 용인은 고재당을 중심으로 청산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이미 출발했기 때문에 농민군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용인 직곡(直谷)과 김량(金良) 등지에 동학 접소가 있어 그 세력이 매우 크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두황은 그날 밤 병사 100여 명을 급파하여 직곡접주 이용익과 김량접주 이삼준을 비롯한 동학군 20여명을 체포했다. 이들을 양지읍내로 압송하여 양지 향청에 붙잡혀 있던 동학군 20여명과 일일이 대질심문했다.
취조 결과 접주로 밝혀진 이용익을 비롯하여 정용선·이주영·이삼준을 양지읍 대로변에서 총살하였다.(9.22) 물론 이들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에서 사형을 집행한 것은 사람들이 동학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10월4일, 용인 출신 동학군 우성칠이 이두황군에게 피살되었고, 10월17일에는 문의에서 이청학이 피살되었다. 동학농민전쟁에 참전하여 피살된 용인 출신의 동학군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여섯 명에 불과하지만 기록으로 남지 않는 인물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경기도의 동학농민전쟁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동학농민군과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은 흔적은 눈에 씻은 듯 찾을 수 없었다.
120년 전의 일이지만 너무 오랫동안 무심히 방치한 탓에 동학농민전쟁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 한 점도 찾을 길이 없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다. 지금이라도 동학농민군들이 전투를 벌였던 곳이나 처형된 장소에 작은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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