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재벌 후계자들 - 임원 조급증 환자들

김종구 논설실장 kimjg@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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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 수도 있었다. ‘조현아는 대한항공 부사장이다. 대한항공 기내서비스를 총괄한다.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점검이 책무다. 현장에서 경험한 서비스에 문제가 있었다. 직원을 다그칠 수 있다. 감정적 표현이 섞일 수도 있다. 들고 있던 서류철을 던질 수도 있다. 비행기 회항이라는 일벌백계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책임자를 내리게 해 경각심을 줄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젊은 부사장의 당찬 지도력이다’.

그런데 세상은 다르게 본다. ‘조 부사장의 행위는 천하에 못된 값질이다. 업무도 모르면서 윽박지른 횡포다. 쌍욕을 입에 담는 천박한 임원이다.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린 안하무인이다. 250명의 고객을 불안에 떨게 한 난동꾼이다. 그런 임원을 감싸려 거짓말로 똘똘 뭉친 대한항공은 거대한 범죄은닉 집단이다. 조 부사장을 구속시켜 일벌백계 삼아야 한다. 대한항공의 부도덕도 상응한 제재로 징벌해야 한다’.

다중(多衆)이 내리고 있는 차디찬 평가다. 여기엔 조 전 부사장이기 때문에 적용되는 특별한 기준이 있다. 재계 순위 9위(2014년 4월 기준)ㆍ계열 회사 48개ㆍ자산총액 39조5천억인 한진그룹 회장의 맏딸이다. 미국 대학원에서 학위까지 받아온 유학파다. 입사 이후 1년4개월마다 승진해온 로열 패밀리다. 하지만 이것들보다 중요한 그만의 잣대가 있다. 바로 ‘젊은 부사장’이란 직함이다.

부사장이 아니었다면 어땠겠나. 회항 명령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기장이 회항 명령을 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론이 이렇게 들끓지도 않았을 것이다. 현직 부사장이어서 비롯된 일들이다. 재벌의 맏딸, 유복한 유학파, 초고속 승진…. 이 모든 조건에 앞서는 악재(惡材)가 바로 현직 부사장이다. 그게 여론이다. 부(富)의 대물림은 몰라도 갑질의 대물림까지 보아 넘기진 않겠다는 게 여론이다.

한진 후계자들이 전부 그렇다. 조 전(前) 부사장은 31세에 임원이 됐다. 25세에 입사했으니 6년만이다. 동생 조원태(38)는 27세에 입사해 30세에 임원이 됐고, 막내 조현민(31)은 24세에 입사해 26세에 임원이 됐다. 맏딸에서 6년 걸렸던 임원 승진이 둘째에서 3년, 막내에서 2년으로 짧아졌다. 그 기간, 한진 이사회는 식솔(食率) 승진을 위한 이사회였다. 그리고 그 ‘임원 조급증’이 지금 회사를 위기로 몰고 있다.

살펴보면 한진만의 얘기도 아니다. 신세계 정용진(46)은 26세에 입사해 1년만에 임원으로 승진했고, 정유경(42)은 24세에 입사해 그해 임원이 됐다. 현대 정지아(37)도 27세에 입사해 1년만에 임원으로 승진했다. 주요 재벌 그룹 3세들의 첫 임원 평균 나이는 31.2세다. 그들의 입사가 28.1세인 점을 감안하면 입사에서 임원이 불과 3.1년이다(한겨레신문 조사). 한국 재벌을 집단 감염시킨 임원 조급증이다.

기업승계와는 전혀 다른 얘기다.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기본 권리가 기업승계다. 해장국 끓이는 가업(家業) 승계는 칭송받을 일이고, 냉장고 만드는 기업(企業) 승계는 지탄받을 일인가. 대를 잇는 해장국에서 진국이 우러나듯이 대를 잇는 냉장고에서 기술은 진화될 수 있다. 70년대 국내 대기업이던 삼성이 2000년대 글로벌 기업으로 컸다. 그 중심에는 분명히 1대에서 2대로의 기업승계가 있었다.

문제는 이런 기업 승계와 임원 조급증을 구분 않는 재벌문화다. 기업 승계라고 말하면서 직책 승계를 밀어붙이고 있다. 경륜ㆍ능력도 검증하지 않은 ‘어린 임원’들을 경쟁하듯 찍어내고 있다. 여론이 이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趙)씨 집안으로 달라붙었다. 언제든 이(李)씨, 정(鄭)씨, 구(具)씨, 허(許)씨 집안으로 옮겨갈 수 있는 분노다. 어느 한 집안이라도 나서 ‘고치자!’고 해야 하는데….

박태준이라는 창업주가 있었다. ‘쪼인트 까기’가 그를 따라다녔다. 일 못하는 직원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고 붙은 별칭이다. 이 ‘쪼인트 까기’는 철강왕(鐵鋼王) 박태준의 기업 전설이 됐다. 그런데 ‘박태준 Jr.’가 포철의 회장이 됐다면…. 그리고 그 ‘Jr.’ 가 선친을 흉내 내 직원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면…. 여론은 틀림없이 분노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설’(傳說) 대신 ‘전과’(前科)를 안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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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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