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洋에 국가 미래가 달려 있다’
하버드 대학생 시절부터의 집념이었다. 저서 ‘1812년의 해전’(The Naval War 1812ㆍ1882년 著)에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가 질적으로 최상 수준의 선박을 보유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1897년에 해군부 차관에 임명됐다. 12척의 전함, 6척의 순양함, 75척의 어뢰정 건조계획을 세웠다. 나아가 하와이를 병합해 태평양을 지배하자고도 했다. 의회는 물론 매킨리 대통령조차 ‘호전적 발상’이라며 반대했다. 반대자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연설했다. “미국은 어떤 외국에게든 ‘우리가 어떤 땅을 차지해야 좋습니까’라고 문의해야 할 처지에 있지 않다”.
‘運河를 건설하고 지배한다’
뉴욕 주지사에 취임한 뒤 곧바로 운하 건설을 주장했다. 중남미 대륙을 가로질러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대역사였다. 영국과 맺은 ‘클레이튼-불워 조약’이 문제였다. 운하 건설은 미국이 하되 군사력 동원은 금지한다는 약속이었다. 앨프리드 마한 해군장관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전시에…우리만 이용할 수 있도록 운하를 방비할 수가 없다면 대체 우리가 왜 그 운하를 파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미국에 의해 완벽히 통제되는 운하 건설을 향한 집념이었다. 영국과의 조약을 책임지던 존 헤이 국무장관은 사표까지 내야 했다-반려됐지만-.
‘反對者를 꼬드기고 협박하다’
대통령에 오른 뒤에도 걸림돌은 있었다. 콜롬비아 루트를 반대하고 니카라과 루트를 선호하는 의회였다. 니카라과와 맞닿은 앨라배마주의 존 모건 상원의원이 주도했다. 지협 관통 운하 위원회도 만장일치로 니카라과 루트를 지지하고 있었다. 하원도 308 대 2의 일방적 지지로 쏠려 있었다. 그는 지역 이기주의에 기초한 니카라과 루트를 무너뜨리기로 작정했다. 위원회 위원들을 차례로 백악관에 초청했다. 어깨를 두드리기도 했고, 일장 연설을 하기도 했고, 압력을 넣기도 했다. 결국, 위원회와 의회는 콜롬비아 루트 지지로 돌아섰다. 모건만 펄쩍 뛰었다.
‘妨害 國家는 파괴해 분열시켜라’
다음 문제는 콜롬비아 의회였다. 1903년 8월 12일, 운하 조약이 만장일치로 부결됐다. 그가 헤이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미래 고속도로를 틀어막는 이 산토끼 같은 인간들에게 교훈을 줘야 할 겁니다’. 파나마 지역에서의 봉기를 조장하라는 암시였다. 이미 반세기 동안 53차례의 소요 폭동 반란이 일어났던 지역이다. 파나마 혁명에 미국이 개입했는지는 그 후로도 논란거리다. 하지만, 당시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파나마 지역이 독립을 열망한다면 (미국은) 그 자리에서 신생국을 승인하겠다’는 공언 이후 파나마가 꿈틀거렸다.
‘挾雜이라도 필요하면 활용하라’
파나마 혁명의 성패는 미국이 쥐고 있었다. 프랑스 사업가이자 로비스트 필리프 뷔노 바리야를 직접 만났다. 파나마 혁명 공작의 임무가 주어졌다. 20년 전 운하 사업의 실패를 보상해준다며 4천만 달러도 쥐어 줬다. 직접 할 수 없는 얘기-미국의 개입 보장 약속-는 헤이 장관에게 대신시켰다. ‘(혁명 때) 해군에게 태평양으로 출항하여 지협으로 향하라는 지시가 내려갈 겁니다’. 바리야는 파나마 혁명가들에게 이 정보를 건넸다. 1903년 11월 4일 봉기는 일어났고 사흘만인 6일 오후 12시 51분 미국은 파나마 정부를 승인했다. 파나마와의 운하조약이 체결됐다.
‘非難과 辱說은 모두 감수하겠다’
운하 프로젝트는 편법과 불법의 연속이었다. 개별 접촉을 통해 의회를 무력화시켰다. 로비스트를 동원해 국제 질서를 어지럽혔다. 음성적 활동을 통해 멀쩡한 국가를 분열시켰다. 파나마 혁명 공작은 그중에도 가장 큰 비판의 대상이었다. 뉴욕 타임즈는 ‘추악한 정복행위’라고 썼고, 이브닝 포스트는 ‘야만적이고 돈에 눈먼 모험’이라고 썼다. 글로브지는 ‘네로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행한 최악의 정복사례와 비교된다’고 평했다. 뉴욕 아메리칸의 만평가는 독수리가 파나마 지협처럼 생긴 동물을 발톱으로 움켜쥔 채 날아오르는 그림으로 그를 비난했다.
‘國民 利益만을 위해 행동했다’
1914년 운하가 완공됐다. 운항권은 이후 85년간 미국이 독점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의 통로가 군사력에 의해 완벽히 보장됐다. 파나마에 준 1천만 달러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국익이 돌아왔다. 1918년 1월,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그가 말했다. ‘외부 자문을 받고 상원에 보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유익한 발언을 꽤 많이 청취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토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파나마는 미래의 일로 남았을 겁니다. 그게 옳았을까요. 저는 먼저 파나마 운하를 얻고 반세기 토론은 그 후에 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1년 뒤 사망하게 되는 그의 마지막 연설이었다.
파나마 운하가 완공된 지 100년이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미국의 해군력은 이제 5대양을 지배하고 있다. 한 척의 위력이 한 나라의 국방력이라는 항공모함만 10척이다. 그 4번 함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위기의 순간에 결단하고, 그 결단으로 국가의 100년을 설계한 대통령. 세계 1위 미국에는 있고, 세계 13위 한국에는 없는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재임 기간 1901~1909) 이야기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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