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떡값 99만원’

김종구 논설실장 kimjg@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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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형량(刑量)은 대개 이랬다. ‘징역 6월’ ‘징역 1년’…. 정해진 규정은 없었다. 그런데도 6개월 단위의 형량이 주류였다. 그즈음 수원지법에 젊은 판사가 있었다. 형사 단독 재판부를 처음 맡은 판사였다. 그의 형량이 독특했다. ‘징역 4월’ ‘징역 5월’ ‘징역 7월’…. 죄질은 범죄자의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하다. 그 다양성만큼 세밀한 형량을 선고하려는 취지로 보였다. 출입 기자들에겐 그의 형량 자체가 기삿거리였다. ▶마침 양형 기준으로 시끄러울 때였다. 그런 만큼 그 판사의 형량은 주목을 끌었다. ‘6월 단위’의 형량에 익숙했던 선배 판사들은 이를 좋게 보지 않았다. 당시 A 법원장이 어느 날 기자들과의 오찬장에서 말했다. “○○○판사에게 내가 말했다. 형량 가지고 깐죽거리지 마라”. 법원장의 형량 지시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참석 기자 누구도 이날 발언을 보도하진 않았다. ▶2007년 5월, 현직 시장 B 씨에 대한 선고가 서울고등법원에서 있었다. 2건의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1심에서 벌금 50만원과 80만원을 각각 선고받은 상태였다. 벌금 100만원 이상이 선고될 경우 시장직을 잃게 된다. 이날 고등법원은 B 시장에게 벌금 8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정에서 박수가 나왔다. 현관에선 많은 지지자들이 축하를 보냈다. 지역 국회의원은 그에게 축하의 꽃다발을 전했다. ▶판결은 분명히 유죄였다. 선고유예도 아니었고 무죄도 아니었다. 범죄경력조회에 흔적-전과-으로 남을 불명예였다. 그런데도 B 시장은 좋아했다. 정치인 재판에서만 볼 수 있는 기이한 광경이다. 신분 박탈의 벌금 한계가 300만원(국회의원), 100만원(단체장) 이어서 그렇다. 300만원과 100만원의 기준이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법이 그렇다. A 법원장이었다면 이랬을 것이다. ‘100만원은 뭐고 300만원은 뭔가. 깐죽거리는 법이다’. ▶김영란 법의 핵심 키워드는 ‘100만원’이다. 100만원 이상 받으면 조건 없이 처벌된다. 공무원ㆍ언론인ㆍ사립학교 교원이 대상이다. 왜 하필 ‘100만원’일까. 이 역시 선거법의 ‘100만원’ ‘300만원’처럼 합리적 근거는 없다. 그저 ‘100만원’을 처벌의 기준으로 만들어놨을 뿐이다. 뇌물 99만원ㆍ떡값 99만원ㆍ촌지 99만원은 괜찮다는 얘긴데…. A 법원장이었다면 또 이랬을지 모른다. ‘100만원 이하 받으면 괜찮은 거냐. 깐죽거리는 법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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