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의식의 역병’

김규태 경제부 차장 kkt@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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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질’(怪疾)은 조선시대 유행했던 가장 무서운 전염병 중에 하나였다. 병명이 없다는 것은 질병에 대한 무지와 정부 차원의 속수무책 등에 기인한다. 근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까지 전염병은 하늘이 내린 말 그대로 ‘역병’이었다.

수백년 전 조선땅에 처음 나타나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콜레라는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내는 듯한 고통’과 함께 죽음으로 몰아가는 돌림병으로 통했다. 온몸이 타는 고통을 겪으며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는 장티푸스도 매한가지였다.

요즘에는 말라리아라는 병명을 얻은 학질은 한기와 고열을 반복하는 지긋지긋함 때문에 ‘학을 뗐다’는 말을 파생시켰으며, 공포의 대상이었던 천연두는 ‘마마’라는 극존칭까지 따라다녔다.

전염병의 유행은 조선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흑사병, 16세기 신대륙의 아즈텍ㆍ잉카 문명의 멸망을 초래한 천연두, 19세기의 결핵과 콜레라, 20세기 스페인 독감, 21세기 들어서는 에이즈를 시작으로 사스(SARS)와 조류독감(AI), 신종플루에, 현재 맹위를 떨치고 있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까지, 전염병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 진화와 변이를 거듭하며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메르스 확산 사태에서 보듯이 의학이 발달한 현대사회에도 전염병의 공포는 항상 존재한다. 전염병이 없는 시대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앞으로도 인간의 탐욕과 자연 그리고 생태계 파괴는 더 진화된 전염병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여기에 있다.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태가 터질 때마다 재확인되는 정부의 대응능력 부재와 관료사회의 경직성. 이를 뛰어 넘는 국가 위기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사태 진정보다는 당리당략에 연연하는 정치권과 공개보다는 감추기 바쁜 정부, 소문을 양산하며 서로를 져버린 네티즌까지. 우리 모두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숙의 시간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의식의 역병’이 고쳐지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이 더욱 혼란스러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규태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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