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늙은 신은 네 분 임금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전하처럼 문란한 왕은 보질 못했습니다. 임금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아 원통합니다.”
1505년 환관 김처선(金處善)이 국정은 돌보지 않고 사냥터에서 활쏘기에만 정신을 쏟고 있는 연산군(燕山君)에게 허리를 굽혀 아뢰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노기가 발동하여 들고 있던 활을 당겨 김처선에게 쏘았다. 김처선은 옆구리에 화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자 연산군은 “내시 주제에 감히…”하며 이번에는 칼을 들어 무참히 김처선을 살해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연산군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자기에게 닥치지 않을까 벌벌 떨뿐이었다.
사실 김처선의 연산군에 대한 충언은 이번만이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행해졌고 특히 연산군이 궁중에서 처용희(處容戱)를 벌일 때 더욱 강한 톤으로 아뢰었다.
그것이 매우 난잡한 섹스 놀음이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궁으로 돌아와 김처선의 고향 충청도 전의(全義, 지금의 세종시)에 묻혀있는 김처선 조상의 묘를 파헤치도록 했고, 세종시 전의초등학교 운동장 서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생가를 불태워 초토화시키도록 했다. 얼마나 바른말로 연산군을 질타했으면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을까?
김처선은 내시, 환관의 신분이면서도 특출한 능력을 가졌던 사람으로 전해진다. 네 분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것만 보아도(연산군까지 다섯 임금)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는 文宗 때 한 사건에 연루돼 유배를 갔다가 단종 때 풀려나기도 했고 1455년 단종 3년, 또다시 정변에 연루돼 유배를 가는 등 유배와 복직을 되풀이했다. 환관의 신분이면서 궁중에서의 비중이 컸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중국어에 능통하여 성종 때에 임금 곁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고 의술에도 뛰어나 성종의 대비를 치료한 공로를 인정받아 ‘자헌대부’에 오르게 된다. 그러니까 정치, 의술, 통역, 의전에 이르기까지 환관 김처선의 실력은 가히 궁궐을 주름잡았다 하겠다.
다시 연산군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게 된 1505년, 그는 그의 죽음을 예감한 듯 연산군 앞에 나서기 전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는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할 말은 하겠다.”고 했다는 것인데 과연 그는 그렇게 극간을 토하고 무참히 죽음을 당했다.
세종시 향토문화연구소는 2년 전 김처선에 대한 포럼을 열고 그의 생애와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임을 이끌고 있는 황우성씨(전 충남도의원)는 김처선이 내시여서 후손이 없고 그래서 자료를 모으기가 매우 힘들어 더 진척시키지 못한다고 했다.
황회장은 예산까지 부족해 공주대학 이모 교수에게 의뢰해 김처선의 생애를 만화로 만들어 겨우 5백부를 각급 학교에 돌렸다며 김처선의 생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전의초등학교 교문 근처에 그의 생애를 소개하는 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람들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정말 이들의 소박한 바람이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비록 내시의 하잘것없는 신분이면서도 감히 광기에 사로잡힌 연산군에게 무참히 살해되면서도 직언을 했던 그 정신은 후대에까지 높이 사야 할 것이 아닌가? 가령 그가 내시의 신분이 아니고 벼슬아치로 임금에게 대들다 죽임을 당했다면 우리는 그를 ‘충신’이라고 높이 떠받들지 않겠는가? 같은 말이라 해도 신분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면 그건 모순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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