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日王 몸에 韓國人의 피가 흐른다는데…

유네스코가 공주ㆍ부여 등 백제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결정하면서 백제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강 유역에서부터 남해안에 이르는 긴 국경선을 갖고 있던 백제는 그 당시 인구, 병력으로 보면 국방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국경의 성벽을 지키는 군사중 일부를 일본의 병력으로 채운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활용했다. 그래서 일본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인데 백제 왕실의 공주가 일왕과 결혼을 하고 왕자들은 일왕의 딸들과 혼인을 하는 한편 백제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는 것이다.

김현구 교수 같은 학자는 전지왕, 동성왕, 무령왕 등을 꼽았고 왕은 되지 못했지만 왕자로 머무른 경우로 아좌태자, 곤지 등을 예로 들면서 일본 왕실에 백제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혈연으로 백제는 일본에 문화를 전해주고 일본으로 부터는 병력을 지원받는 특수한 관계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아키히토 천황은 2001년 1월 23일 공식적으로 “나 자신으로 말하면 간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501~523)의 자손이며 내 몸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실제 30대 천황 비타스(敏達 572~585)는 백제 왕족으로 분류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학자로 ‘서기(書記)’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고 있는 교토시립역사자료관장 이노우에씨는 “백제는 우리의 배꼽이며 일본인의 DNA에 백제의 것이 있다.”고 고백했다. 이야말로 일왕은 물론 일본 문화의 본류는 통째로 백제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확실히 일본은 백제와 군사적 협력을 돈독히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660년 6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663년 7월 2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파견, 백제를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금강을 따라 부여로 향하던 일본군은 백강(白江) 좁은 협곡에서 나당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1만7천명이 전멸했다.

이것이야말로 한반도에서 펼쳐진 일본과 중국(唐)이 참전한 최초의 국제전이었는지 모른다. 또한 이것이 한반도가 지닌 지정학적 운명이기도 하다. 그 후에도 일본군이 미군과 더불어 이 땅에서 전쟁을 치를 기회가 있었다.

1950년 6월 27일,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위기에서 정부는 대전으로 피란을 왔었다. 충남도지사 관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임시관저로, 충남도청은 임시 중앙청이 되었다.

그때 7월 1일 밤, 무쵸 초대 주한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했다. 그리고는 625 전세가 좋지 않으니 급한대로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게 어떤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이대통령은 얼굴이 굳어지며 “만약 일본이 우리를 돕겠다고 상륙해온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총구를 돌려 쫓아내겠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로부터 미국은 이대통령 앞에서 다시는 이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한일 국방장관 회담이 4년여만에 지난 달 싱가포르에서 열렸는데 유사시 미국과 공조로 일본이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관심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군사적 행동은 여전히 의심스러운데가 있다. 지난해 일본 내각이 통과시킨 헌법해석에 대해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가 ‘자위조치로서의 무력행사’란 모호한 개념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근대사에 이르러 ‘배신의 外交’를 수없이 반복해 우리 민족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 일본이기에 우리는 계속 경계와 의심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번 유네스코가 일본의 근대산업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전제가 됐던 ‘강제노역’(forced to work)의 합의문 해석을 뒤집는 것만 봐도 그렇다.

요즘 ‘배신의 정치’가 화두이지만 ‘배신의 외교’가 더 무서운 것은 국가의 안보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日王의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면 우리에게 ‘신뢰의 이웃’이 될 수는 없을까?

前 세종시정무부시장변평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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