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무감독 시험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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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는 ‘생도는 거짓말, 부정행위,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그런 행동을 하는 이들을 용납하지 않는다(A cadet will not lie, cheat, steal or tolerate those who do)’라는 서약이 커다란 돌에 새겨져 있다. 생도들은 이 서약을 철칙으로 여기며 생활한다. 이를 어길 경우 처벌보다 불명예를 더 부끄럽게 여긴다.

미국 프린스턴대의 모든 시험은 감독관 없이 진행된다. 학생들은 시험이 끝난 후 ‘나는 아너 코드를 어기지 않았다’라고 서명한다. 본인뿐 아니라 타인의 부정행위까지 학교에 신고하도록 하고, 위반시엔 퇴학까지 감수해야 한다.

‘아너 코드(Honor codeㆍ명예규약)’는 학생들이 ‘시험이나 과제물 제출, 논문 작성 등에 있어 정직하게 행동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학교에 제출하면 교수들이 학생들의 명예를 존중해 시험을 감독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치르게 하는 제도다.

1840년 미국 버지니아대학에서 처음 시작돼 현재는 하버드대ㆍ스탠퍼드대 등 미국 주요 대학에서 채택하고 있다. 아너 코드는 학생 개인의 양심과 교수ㆍ학생 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부정행위를 할 경우 처벌도 강력하다.

국내에선 한동대가 1995년 개교 때부터 아너 코드를 운영하고 있다. 한동대는 입학 때와 매 학년 시작할 때 등 모두 4번 명예서약에 서명한다. 중간ㆍ기말고사 시험지엔 ‘나는 정직하게 시험에 응하였음을 확인합니다’라는 서명란이 있다.

서울대 자연대가 내년부터 아너 코드를 적용하고, 무감독 시험을 시행하기로 했다. 서울대는 1학기 교양과목 중간고사에서 집단 부정행위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었고, 재시험까지 치렀다. 서울대 본부는 부정행위 근절을 위해 스마트폰 수거 등 각 단과대에 시험감독 강화 지침을 내렸다.

하지만 자연대는 감독 강화가 부정행위에 대한 근본적 해결이 될 수 없다고 판단, 아너 코드 도입과 함께 무감독 시험을 시행하기로 했다. 자신의 명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고 스스로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게 교육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에서다.

아너 코드의 핵심은 정직과 양심이다. 학생들을 강제로 옭아매는 규칙이 아니라 스스로 정직을 선택하게 만드는 문화다. 시험 감독이 없는 상태에서 양심에 따라 시험을 치르는 서울대의 무감독 시험제가 성공하고, 또 널리 확산되길 기대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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