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130년 넘게 서양 예술음악의 전통을 이어온 오케스트라가, 전에는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었고 연주하지도 않았던 영화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지난 6월 말, 베를린에 위치한 발트뷔네 원형 야외극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2만 2천여 명의 베를린 시민들이 모인 앞에서 어린이 만화영화 ‘톰과 제리’나 ‘벤허’, ‘인디아나 존스’, ‘스타워즈’, ‘ET’와 같은 미국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연주한 것은 ‘파격’과 ‘외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카라얀이 무덤에서 뛰쳐나와 대성통곡할 일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베토벤이나 브람스 같은 엄격한 절대음악만을 연주해온 전통을 깨버리고 파격적으로 대중을 위한 영화음악을 연주한다고 해서, 영화 속의 상업음악을 가벼운 음악으로 평가 절하한다거나 무시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130년 넘는 기간 동안 대중음악을 단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던 고집스러운 오케스트라의 보수적 배타성에 돌을 던지려고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1882년 창단 이후, 가장 탁월하고 창조적인 작곡가들의 음악들을 연주하여 전파하고 또 지켜왔던 이 오케스트라의 위대한 전통과 영역의 존재 가치는 오늘날까지도 자연스럽게 인정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베를린 필하모닉은 작품의 해석과 연주에 대해서는 훌륭한 수준과 실력을 변함없이 유지해오고 있다.
실제로 이번 발트뷔네 콘서트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중국의 신동 피아니스트 랑랑이 함께 협연한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은 필자가 연주회에서나 음반을 통해 이제껏 들어왔던 그 어떤 연주보다도 뛰어난 최고의 연주였다.
이어 연신 즐거운 표정을 짓는 사이먼 래틀 경의 지휘로 연주되는 곡들은 콘서트홀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들이 영화극장에서 혹은 TV나 라디오를 통해 들은 적이 있는 친숙한 음악들이다. 잊지 못할 명화 ‘벤허’의 음악을 베를린 필하모닉의 세련된 연주로 감상하며 느끼는 이 낯섦과 신선함은 예전에는 아무도 겪어본 일이 없었다.
이번 발트뷔네 콘서트의 스케치는 베를린의 초여름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추억의 영화음악들과 오케스트라에서 양념처럼 준비한 익살스러운 퍼포먼스들이 소풍 온 듯한 가벼운 옷차림으로 모여든 베를린 시민들을 마냥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정겨운 광경이다.
마지막 곡 연주에서, 위치를 바꾸어 래틀 경이 타악기 연주를 하고 단원 중 한 사람이 포디엄에 올라 지휘하는 모습의 연출은, 단순한 쇼맨십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모두 기존의 틀과 권위, 자존심을 던져버리고, 대중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자신들을 개방하고 소통하겠다는 기호와 의지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중세 수도원처럼 폐쇄적이고 엄격하기만 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미래를 향한 변화와 혁신은 독일음악과 독일인 순혈주의를 타파하고 2002년 영국 지휘자 사이먼 래틀을 음악감독으로 선택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파멜라 로젠베르크 단장과 함께 래틀은 다양한 청중을 끌어들이고 미래청중을 개발하기 위해, ‘개방’과 ‘소통’을 바탕으로 한 개혁 작업에 속도를 가했다.
도이치뱅크와의 업무제휴, 다양한 후원금 확보를 통해 기획한 교육프로젝트 ‘Zukunft@BPhil’는 대단히 성공적인 혁신적 프로젝트였다. 변화를 위한 다양하고 폭넓은 시도를 해왔던 래틀은 2006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빈 필하모닉은 19세기 오케스트라지만, 베를린 필하모닉은 21세기 오케스트라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바티칸에서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 방식을 통해 최근에 선출한 차기 상임지휘자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43세 유태계 러시아 출신의 무명 오페라 지휘자였다. 또 한 번의 파격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베를린 필하모닉의 미래를 향한 다음 행보와 변화가 어떤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해지고 기대가 된다.
임형균 톤마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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