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 1천명에게 이렇게 물었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누구인가.’ 1등 남경필(24.3%), 2등 김문수(20.6%), 3등 손학규(13.9%)다. 현(現) 도지사, 전(前) 도지사, 전전(前前 도지사다. 3선, 4선 국회의원들은 그 아래 있다. 여야 원내 대표들은 더 아래다. 이래서 경기지사를 ‘소권(小權)’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명박 이후 서울시장에 밀리는 듯하긴 하다. 그래도 여전히 경기지사는 잠룡(潛龍)이고 대망(大望)이다.
재미있는 건 4위다. 김진표 전 의원(6.8%)이다. 원혜영(5위) 정병국(6위) 이종걸(7위) 원유철(8위)보다 앞섰다. 저마다 선수(選數)와 직책(職責)을 자랑하는 거물들이다. 이런 거물들을 현역도 아니고 직책도 없는 김 전 의원이 이겼다. 1, 2, 3등엔 어차피 도지사 프리미엄이 붙었다. ‘계급장 떼고’ 계산하면 김 전 의원이 1등인 셈이다. 경제ㆍ교육 2번의 부총리를 했어서일까. 김 전 의원은 역시, 그리고 여전히 쎘다.
7개월 앞으로 다가온 총선판에서도 쎄다. 수원 정치가 그를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다. 4개 지역구 중 장안과 영통은 야당이 현역이다. 권선과 팔달에서 야당 후보들이 경쟁 중이다. 여기에 지역구 신설 얘기도 있다. 결국 새내기 야권 후보들이 들이밀 곳은 세 곳이다. 그런데 세 곳 모두에서 김 전 의원이 거론된다. 권선은 그의 근거지라며, 팔달은 수원의 상징이라며, 신설구는 영통과 인접했다며 그의 이름이 나온다.
같은 당 후보군들에겐 가히 공포다. 그를 피하는 것이 선택의 기준이다. ‘김 전 의원이 어디로 나올 것 같으냐’ ‘김 전 의원이 동네에 들렀던데 이곳으로 결정한 것이냐’는 얘기가 숱하다. 상대 당 후보군도 떨기는 마찬가지다. 남 지사도 측근에게 ‘가급적 김진표와의 경쟁은 피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렇게 수원 정치의 이 순간 화두는 ‘김진표 피하기’다. 흡사 정어리 떼를 몰아내는 상어의 위용(威容)이다.
6년여 전쯤인가. 식사를 했다. 여의도에서 유명하다는 ‘김진표 주(酒)’가 몇 잔 돌았다. 동문 얘기가 나왔고 갑자기 그가 밥상을 쳤다. ‘(선배들은) 이제 그만 기득권을 놔야 한다. 언제까지 상왕 노릇들을 할 것인가. 나도 벌써 젊은이들과 호흡이 안될까봐 신곡도 듣고 노력하고 있다.’ 옮기는 표현이 틀릴 순 있다. 하지만, 밥상을 치던 모습과 선배들의 용퇴를 강조하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어느덧 그가 그 또래다.
그래서 궁금하다. 지금도 그때의 소신 그대로인가. 그때의 논리대로 용퇴할 생각이 있는가.
애초 나이(68)는 기준일 수 없다. 그가 입으려는 ‘옷’이 문제다. 영통 주민은 그에게 세 번 옷을 입혔다. 매번 일방적 지지였다. 1년 전, 스스로 그 옷을 벗었다. 더 큰 옷을 입고 싶다고 했다. 소권이라는 옷, 대통령 후보라는 옷, 바로 경기도지사라는 옷이었다. 그러자 주민들은 더 큰 사랑으로 응원했다. 꼭 도지사가 되라며 몰표를 줬다. 결과는 석패(惜敗). 새벽녘에 끝난 1% 승부에 맘 졸인 주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벗었던 옷을 다시 입으려는 모양이다. 그것도 이 동네 저 동네 옮겨 다니면서까지.
‘사퇴’에 얽힌 회색빛 전력도 있다. 도지사 선거를 앞둔 작년 4월 11일, 그가 기자회견을 했다. 당의 경선룰 변경 움직임에 대해 “도지사 후보를 사퇴할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놨다. 의견이 받아들여지자 사퇴 얘기는 들어갔다. 경선에 임하는 기술이었다 치자. 하지만, 그 4년 전 사퇴 파문은 달랐다. 도지사 하겠다며 의원직을 사퇴했다. 후보가 안 되자 다시 국회로 들어갔다. 모두에게 적법성을 따지게 만든 해괴한 기록이다.
툭하면 썼다가 툭하면 주워담는 국회의원 사퇴서. 그에게 의원 배지는 욕망을 거래하는 교환권인듯 싶다.
거물임은 틀림없다. 세월이 흘러 이제 그가 수원의 어른이다. 어린이와 어른은 달라야 한다. 어린이들이 싸우면 어른이 말려야 한다. 지금 수원 정치판은 ‘정치 어린이들’로 시끄럽다. 서로 물고 뜯는 중이다. ‘정치 어른’ 김 전 의원이 나설 때다. 권선구에 가서 정리해주고, 팔달구에 가서 가려주고, 신설구에 가서 말려줘야 할 때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없다. 되레 그 이전투구의 한복판에 ‘김진표’라는 이름 석 자가 있다.
뭔가 어색하지 않나. 뭔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지 않나. 6년 전 어느 날, 그는 선배들의 용퇴를 말하며 밥상을 쳤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그의 용퇴를 말하며 밥상을 치고 있을지 모른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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