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일 뿐… 어르신들 신바람 ‘IT 배움터’
노인들의 얼굴에 자리잡은 주름에는 연륜과 인생의 깊이가 묻어난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철학이 묻어나는 말에 쉬이 귀 기울이지 않는다. 노인들은 세상에 자신들의 말을 하고자 IT교육을 받고 카메라와 사진기를 집어들었다.
세상을 자신들의 눈으로 기록하며, 배움을 나누고 전파하는 사회적기업 은빛둥지(라영수 원장ㆍ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할머니ㆍ할아버지 이야기다.
은빛둥지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노인들의 IT 교육을 역설하며 IT 기반 노인 평생 학습당을 목표로 한다. 60대 초반부터 80대 후반까지 백발의 할머니ㆍ할아버지들은 자신들의 앎을 또래 노인들에게 교육하고 함께 공유한다.
이곳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은빛둥지는 노인들에게 그대들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말을 할 수 있고, 빛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 나이는 숫자에 불과… IT 배움에 대한 열정
지난 11일 안산 은빛둥지 2층 강의실. 문을 열자 컴퓨터 앞에 앉은 10여명의 교육생들의 눈빛이 뜨겁게 타올랐다. 이날 진행된 포토샵 교육을 듣는 이들은 백발이 성성한 60~80대 어르신들이었다.
사진을 편집하기 위한 설명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모두가 숨을 죽이며 박상묵 부원장(68)을 응시했다. 방학 중이라 정규 수업이 없었는데도, 강의실을 찾은 이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도 막지 못했다.
스무평 남짓한 공간에 자리 잡은 은빛둥지는 노인들의 컴퓨터 스터디그룹이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안산공과대학에서 청강생으로 컴퓨터 관련 수업을 들었던 라영수 원장(76)이 우연히 동회에 들렀다가 컴퓨터 교실에 모여 있는 노인들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한두 개씩 알려줬다.
그렇게 며칠을 하다 보니 ‘선생’으로 불렸다. 이후 2001년 6월 27명의 수강생을 대상으로 3개월짜리 강좌를 시작했다.
강좌를 마칠 무렵 배움이 고달팠던 수강생들은 그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이들과 함께 노인 컴퓨터 동아리 ‘은빛둥지’를 만들고, 안산시에서 지원받은 빈 건물에 둥지를 틀었다. 대학교에서 사용하다 버린 컴퓨터, 책상을 들여와 구색을 갖췄다.
라 원장은 “사람도, 자재도 고물이었지만 배움과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젊었다”면서 “컴퓨터를 배우고 서로 아는 지식을 공유하며 어떤 이들은 영상제작, 사진 촬영 등에 나섰다”고 말했다. 컴퓨터 수업을 받은 어르신 중 몇몇은 직접 TV콘텐츠를 만들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국가, 지자체 등의 지원이 없었지만, 이를 안정적인 수익창출 모델로 활용하기로 했다. 교육을 받은 어르신들이 직접 제작한 프로그램을 방송사에 송출하거나 단체ㆍ기관 등에 홍보 영상을 제작해주고 수익을 얻는 것이었다.
노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 수익모델까지 접목하면서 지난 2009년 예비사회적기업이 된 후 2013년 사회적기업으로 발돋움 했다. 연매출 1억원을 꾸준히 벌어들이며 이 수입은 다시 노인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 노인 IT 교육과 영상 제작… 노인 일자리 창출과 평생학습 제공의 선순환 구조
은빛둥지는 간단한 컴퓨터 기초작업에서부터 포토샵반과 홈페이지반, 사진반 등이 운영된다. 현재까지 은빛둥지에서 3개월 과정의 교육을 받은 이는 모두 7천500명에 달한다. 교육과 자원봉사 등을 담당하며 매월 1만원의 회비를 내는 정회원은 178명이다.
안산시의 노인들뿐만 아니라 타지역에서 소문을 듣고 문을 두드린 노인들도 적지 않다. IT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얻은 이들은 영상이나 사진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했다. 노인 동아리에서 태동한 은빛둥지는 놀라울 만큼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금까지 각종 IT 경진대회 노인부문에서 우승만 10여 차례에 할 정도로 실력을 자랑한다.
또한, 각종 노인영화제, 사진전 등에서 수상하는 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2009년 서울노인영화제에서 ‘나의 망초 이야기’로 대상을 받은 조경숙(86) 할머니도 그 중 한 명이다.
조 할머니는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지만, 최근 ‘상처’를 주제로 한 영상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은빛둥지에 다시 나와 작업을 하고 있다. 전문적이지 않더라도 이곳에서의 배움은 어르신들에게 새 삶을 가져다준다.
현업에서 은퇴한 후 70세부터 은빛둥지 교육에 참여한 배주은(77)할아버지의 시작은 외국에 있는 아들과 인터넷 전화로 통신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배 할아버지는 인터넷 수업을 들은 뒤 사진, 동영상 촬영 등도 배우면서 이제 가족 전문 사진사가 됐다.
배 할아버지는 “노인이 컴퓨터를, IT를 알아서 뭣하겠냐는 것은 모르고 하는 소리”라면서 “문명의 발달을 내가 이용할 수 있으니 기쁨도 크고 손자들한테도 많이 아는 할아버지가 됐다”고 흡족해했다.
■ 어르신들의 봉사ㆍ나눔…제3의 엔진
은빛둥지에서 진행하는 모든 활동은 곧 나눔이다. IT 기반이 잘 갖춰진 국가 인프라, 함께 배운 지식으로 체계를 갖췄으니 많은 이들에게 열매를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영정사진 촬영 봉사다. 은빛둥지에서는 1년에 어르신 500명을 대상으로 무료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봉사를 하고 있다. 지난 2006년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안산시에 거주하는 7천여명의 어르신에게 영정사진을 찍어 액자에 넣어줬다.
또 ‘좋은 마을 만들기 사업’에 참여해 본오동에 거주하는 다문화가정과 고려인 가정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독립운동가 염석주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잊혀가는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했다.
정부의 무관심에 잊혀가는 독립운동가를 밝히려고 3년간 인터뷰한 이들만 300명. 다큐멘터리에는 염석주의 활동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이들의 3년간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지역사회를 뭉클하게 하기도 했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노인복지에 대한 담론은 많지만, 실질적인 활동을 위한 뒷받침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시시각각 변하는 IT 시대는 젊은이들이 전유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은빛둥지는 이런 IT 시대야 말로 노인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최적의 시대라고 말한다.
라 원장은 “노인이야말로 IT 시대와 딱 들어맞는 찰떡궁합”이라며 “노인을 위한 IT 정보화 교육, 평생학습교육이 체계화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시대는 정보가 넘쳐나지만, 소양과 경험이 없다. 다양한 소양과 경험을 가진 노인들의 지식을 IT 시대에 새로운 동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 원장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노인에게는 젊은이들이 갖지 못한 평생의 다양한 경험이 있어. 이를 컴퓨터에 입력시켜 주고, 다듬으면 제3의 엔진이 되지 않겠어? 디지털 시대에 노인이 뒤처진다고 생각하지 마. 디지털 세계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듯이 노인들도 얼마든지 이를 활용할 수 있다구.”
정자연기자
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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