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보다 아름다운 ‘낮 문화’… 예술로 살려내다

[경기도시재생, 문화로!] 2. 평택 안정리

참 희한한 동네다. 낮은 시멘트 회색 벽돌담 앞에 형광 주황ㆍ초록색의 야자수 모형이, 분명 이질적인데 너무 자연스럽게 서 있다.

한국어와 영어를 병기한 음식점 간판이 즐비한 상점골목을 30여m 지났을 뿐인데, 폐가 담을 넘어 뻗쳐 있는 잡풀들에 공격당하고 있는 후미진 골목길이 나온다.

꼬부랑 할머니가 폐지를 줍고 그 옆으로 은발의 중년 외국인 여성 세 명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지나간다.

미군부대 앞에 자리 잡은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마을의 풍경이다. 최근 이곳에서 이질적이고 분리된 그 사이를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파고드는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경기문화재단이 평택시로부터 위탁받아 2013~2015년 진행하는 ‘안정리 마을재생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 굴곡진 근현대사에 사연 많고 갈등 깊은 마을

1942년 일제강점기 안정리에서는 비행장 건설이 한창 진행되다가 해방과 동시에 중단, 이 기반시설을 토대로 미군 기지가 자리 잡게 됐다. 1950년대, 갑자기 불어난 미군에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마을로 형성된 곳이 바로 평택 안정리 마을이다.

1952년 미군 K-6가 주둔하면서 기지촌이 형성, 유흥업과 각종 미제 상품 유통업으로 호황을 누렸다. 70~80년대에는 기지촌 여성이 2~3천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하지만 급격한 교통 발달과 사회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그들만의 공간에 갇혔다. 1990년대부터 상권은 점차 쇠퇴해 빈 점포가 급격하게 늘었다. 한 때 미군기지 평택 이전 발표로 개발투자 붐이 일기도 했다.

외지인들은 안정리 마을의 주요 건물과 땅을 매입해 방치한 채, 값이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던 중 2010년 평택시가 뉴타운 개발 구역으로 지정했다가 반대하는 주민 투표로 전격 취소했다. 주민 간 갈등은 심화됐다. 재개발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과 개발로 살 곳을 잃어버릴 상황이 두려운 거주자들의 욕망들이 부딪힌 것이다.

 

주거 환경과 각종 마을 시설은 노후되고 슬럼화는 날로 심각해졌다. 실제로 지난 2012년 전문 조사 기관 ‘기분좋은 QX’에서 실시한 <지역문화교류기반구축 전략실행상세계획수립 조사연구용역>에 따르면, 안정리 쇼핑몰에 빈 점포는 74개로 전체 상점 수의 17%를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심지어 하루 평균 20만원 미만 매출을 기록하는 상점은 과반수 이상으로 나타났다.

주택가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졌다. 재개발만을 기다리는 폐가들이 골목 한 가운데 위치해 인근 공사장 인부의 무허가 숙소가 되는가 하면 쓰레기장으로 전락하는 등 우범지대가 됐다. 공사를 하려 해도 주인을 찾기 어렵거나 오히려 거부하는 통에 시도조차 못했다.

이대로 미군 7만여 명(가족 포함 예상치)이 유입될 경우 ‘돈만 벌기 위한’ 음성적 문화가 판치는 미래상이 뻔했다. 마을 사람들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양성적 문화가 조성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했다. 선택은 ‘문화적 도시재생’이었다.

 

■ 밤보다 아름다운 낮을 만들자

“군사기지에만 의존해 온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고 자생할 수 있는 원동력을 찾는 것이 시급했다. 더 많은 미군과 가족이 들어왔을 때 국제적인 문화 교류와 양성적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기반을 닦는 데 초점을 맞췄다.”(조지연 경기문화재단 문화재생팀)

평택시는 경기문화재단과 2013년 MOU를 체결하고 2013~2015년 3년 동안 문화예술을 통해 안정 마을의 ‘양성적 문화 만들기’에 착수했다. 안정 마을에 투입된 민간 전문가들은 주민간담회만 100여 회 이상 갖는 등 관계 맺기를 시도했다. 2014년에는 각 사업이 본격화 됐다.

일단 옛 보건소를 리모델링해 ‘팽성예술창작공간 ArtCamp(이하 팽성아트캠프)’로 개관했다. 현재 주민과 상인, 미군들의 예술창작교류 공간이자 지역 거점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뤄진다.

지역 어르신들이 바리스타로 변신해 장날이면 문 여는 카페, 에코백 등 예술가와 주민이 함께 개발한 예술상품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가게, 60세 이상 노년층으로 꾸려진 치어리딩 ‘팽성 시스타’ 등 주민 커뮤니티의 연습 및 회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마을축제는 밖으로는 지역 특성을 알리고 안으로는 주민 화합 및 낮 문화를 즐기는 인식 변화를 가져왔다. ‘마토제’(4, 5, 6, 9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개최하는 예술풍물시장)와 ‘평택 코스튬플레이 페스티벌(매년 10월 개최)’이 그것이다.

 

로데오 거리에서 음식점을 운영중인 A씨(53)는 “낮에는 진짜 썰렁한데, 마토제를 하면 어떻게들 알았는 지 낮에도 사람들이 오니까 신기하더라”면서 “행사 당일에는 매출도 조금 늘어, 자주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토제를 비롯한 주력 사업들이 이 같은 성과를 내는 데에는 ‘한미문화예술위원회’의 역할이 컸다. 이 위원회는 주민대표와 지역협회, 미군장교부인협의회, 다문화가족 등을 모아 구성한 것이다.

매월 회의를 열어 각 입장과 요구 사항을 논의하며 사업 계획 및 운영, 홍보 등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다양한 마을 구성원들이 소통하면서 자연스러운 공동체 회복, 국제문화도시 브랜드 구축 등의 주축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모임이다.

■ 보이지 않는 성과 응원하며 지속성 가져가야

경기문화재단은 2014년까지 진행한 평택 안정리 마을 재생 프로젝트로 빈 점포가 74개소에서 19개로 감소, 노후상점 20개소의 리모델링, 상가 매출 평균 150만원으로 7.5배 증대 등 지역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거점공간인 팽성아트캠프 활성화, 국제문화예술교류위원회의 역량 강화, 특화된 마을 축제 개발 및 개최 등을 기반으로 이뤄진 비교적 가시적인 성과로 꼽을 만 하다.

재단은 위탁 사업 기간 마지막 해인 2015년, 일단 마을 사람들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또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벽에 적는 레터링 프로젝트와 폐가 앞을 온전한 건물 이미지가 그려진 현수막으로 가리는 등의 환경 개선 사업을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안정리 마을은 암울해 보였다. 낮에는 문 닫은 상가들이 더 많고, 거니는 사람 찾기 어려우며, 주택가 한 복판 폐가에 쌓인 쓰레기탓만은 아니다. “예술가들이라고 와서 무료 교육하고 그러는데, 그거 다 예산 낭비”라며 “저 사람들 내년에 떠나면 또 시끄러워질 게 뻔하다”는 상인 B씨(57)처럼 안정리 마을 사람들에게서 아직 희망보다 원망과 체념이 더 크게 느껴지는 탓이다.

이와 관련 “가변적 프로젝트만 가능한 마을이어서 가시적 성과를 내기 어렵지만 지금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마을 사람들이 동네를 다시 보고 애착을 갖게 된다면 무엇보다 의미있는 성과일 것 같다”는 전수린 팽성아트캠프 기획자의 ‘깨달음’이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이제 싹을 틔운 안정리의 문화적 도시재생은 꽃을 피우기까지의 전문가들의 고집스러운 정성과 시간이 가장 필요해 보인다.

류설아기자

사진=김시범기자, 경기문화재단 제공

후원 : 경기문화재단

김윤환 팽성아트캠프 총감독

“미군 의존보다 원주민 기반 둔 프로그램 개발… 다문화 국제도시로 가야”

“미군과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미군들은 2년이면 되돌아갑니다. 그런 면에서 미군에 의존, 경도된 프로그램 보다 원주민을 대등한 입장으로 소외시키지 않는 교육과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안정리 마을은 이제 다문화국제도시를 지향해야 합니다.”

올 초 팽성아트캠프의 총감독으로 부임한 김윤환이 기존의 한미교류예술위원회를 국제문화예술위원회로 바꾼 이유다. 마을 특성상 미군이 참여하는 협의기구가 필요하지만, 좀 더 장기적으로 건강한 방향성을 유지하기 위해 원주민을 주축으로 세우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지역의 거주자, 기획자, 예술가 등을 만나며 그들이 공간(팽성아트캠프)과 축제 및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예로 팽성아트캠프 1층에는 바로 옆 경로당의 할머니들이 운영하는 오픈 카페로 운영하고, 10월에 열리는 코스튬 페스티벌에서 사용할 의상 제작을 위해 주민 교육을 실시한다.

안정리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목공과 도예 등을 배운 사람들에게는 마토예술제에 전시와 물품 판매를 제안했다. 마을 브랜드 상품을 제작하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 협동조합을 꾸리자고도 했다.

“기존에 진행된 각종 프로그램 참가자들을 주체로 세우고 엮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어요. 사실 도시재생에 있어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렵죠. 다만 지역의 주체를 잘 발굴해 그들이 외부 전문가와 협력하면서 꾸준히 밀고 나갈 수 있는 지구력과 추진력을 갖게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류설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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