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에는 ‘뒤주’라는 표현이 없다. ‘自內嚴囚’(자내엄수ㆍ안에다 엄중히 가두었다)라 기록됐을 뿐이다. ‘뒤주’라는 도구를 언급한 것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다. 회고록 한중록에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어 정조실록도 ‘一物’(일물ㆍ한 물건)이라는 표현을 반복해 쓰고 있다. 혜경궁 홍씨와 정조 모두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봤을 신분이다. 그래서 ‘뒤주 참변’은 정설로 여겨진다. 실록 속 영조는 매정하다. 세자가 뒤주에 갇힌 5월 13일 이후에도 국무를 계속한다. 육상궁(毓祥宮ㆍ역대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곳)에 나아가 전배했다. 문을 지키는 군사를 위로했다. 주강에 참석하고 인사도 처리했다. 세자를 추숭하지 못하도록 지침까지 내렸다. ‘한 글자라도 더 높여서 받들면 그것은 할아비를 잊는 것이고…’(갑신처분). 그렇게 실록은 영조를 자식 죽인 냉혹한 군주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런 실록도 감추지 못한 아버지 눈물이 있다. 참변 두 달 만에 묘를 찾았다. 정자각에 들어가 곡림(哭臨ㆍ임금이 친히 곡하고 조문함)했다. 그러면서 “그때(참변)에 비로소 아버지라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니, 오늘은 아버지를 부르는 마음에 보답하려 한다”며 슬퍼했다. 신하들이 ‘신들도 곡하는 예를 올려야 합니까’라고 묻자 “참여하라, 또한 백관도 참여하라”고 했다. 실록조차 감추지 못한 ‘아부지’ 모습이다. -아들이 갇힌 뒤주 위로 비가 내린다. 그 비를 맞으며 아버지가 홀로 섰다. 죽어 가는 아들을 향해 눈물의 인사를 건넸다. 이어 뒤주가 열리고 절명한 아들 앞에 아버지가 앉았다. 아들의 얼굴을 만지며 아버지가 오열한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이다. ‘천만 배우’ 송강호가 홀로 연기한 5분여의 롱 테이크다. 그런데 대사 전달력이 천만 배우답지 않다. ‘무슨 대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관람객의 후평이 많다. 그런데도 많은 아버지들이 이 장면에서 울었다. 아들이 죽어 갈 때서야 속을 털어놓은 아버지. 미치지 않은 아들을 미치광이로 기록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 눈 감은 아들 앞에서 마지막 숨결을 거두어 내는 아버지. 여기에 무슨 대사 전달력이 필요한가. 연기자든 관람객이든 그저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두는 것으로 족하다. 영화 사도를 통해 역사 속 ‘아버지’와 이 시대 ‘아버지’들이 함께 느끼는 ‘아부지’의 정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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