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감정노동자’ 경찰관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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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감정을 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나타내야 하는 사람들을 ‘감정노동자’라 한다. 은행원이나 승무원 같이 직접 고객을 대해야 하는 서비스ㆍ판매 종사자들이 거의 해당된다. 

앨리 러셀 혹실드 캘리포니아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가 1983년 ‘감정 노동(The Managed Heart)’이라는 책에서 처음 거론한 개념이다. 혹실드는 인간의 감정까지 상품화하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감정노동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억누른 채, 자신의 직무에 맞게 정형화된 행위를 해야 하는 감정노동은 감정적 부조화를 초래하며 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이를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할 경우 좌절, 분노, 적대감 등 정신적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겪게 되며, 심한 경우 정신질환 또는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치안 유지와 법 집행의 최일선에 선 경찰도 감정노동자도 분류된다. 정상적 국가에선 제복 입은 경찰은 그 자체로 법과 권위를 상징한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선 민원인과 범죄자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감정노동자가 됐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경찰관은 한국의 주요 직업 730개 중 ‘화나게 하거나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만나는 빈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화나게 하는 사람을 상대하면서도 자기 감정을 억제하고 나타내선 안되는 대표적 감정노동자로 꼽히는 텔레마케터, 보건위생 및 환경검사원과 함께 공동 1위에 올랐다.

 

지난달 서울의 한 경찰서 수사관에게 “인터넷에서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한 여대생이 찾아왔다. 증거 사진도 없고 진술도 오락가락해 수사를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이런 사정을 설명하자 여대생은 욕을 하며 짜증을 냈다. 점심을 먹으러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그의 노트북엔 여대생이 마시던 커피가 부어져 있었다.

 

지난 3월 제주의 한 커피숍에선 50대 남성이 술에 취해 고성을 지르는 등 소란을 피우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의 얼굴을 수차례 주먹으로 가격해 코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고성과 반말, 욕설은 보통이고 심지어 폭력에 시달리는 경찰관의 수난이 도를 넘고 있다. 경찰관들은 강력범 대처나 징계ㆍ승진 스트레스보다 악성 민원인으로 인한 고통과 스트레스가 더 크다고 한다.

 

21일은 경찰의 날이다. 감정노동자가 된 경찰의 노고를 한번쯤 생각하는 날이 됐음 싶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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