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들의 만세운동 주도한 ‘義妓’
가족은 아버지 김인영(金仁永), 어머니 홍금봉(洪今鳳), 7살 차이나는 오빠 창환(昌煥)과 4살 어린 여동생 점순(点順)이가 전부였다. 구한말 일제초기는 사회적 혼란과 수탈 속에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생계마저 위협받던 시절에 김순이(김향화)라는 어린 처녀는 입이라도 하나 줄여 보겠다는 생각으로 수원군 북수리 48번지에 사는 정도성(鄭道成)과 결혼을 감행한다. 남편은 부모라고 해도 믿을 만큼 나이차이가 났고 김순이보다 6살이나 나이가 많은 딸도 있었다.
남편 정도성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먹고 살만한 여유가 있었거나 아들을 얻기 위해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김향화는 15살이나 16살 쯤에는 결혼을 했을 것이다.
1911년이나 1912년경에 이미 수원으로 와서 거주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 일제식민지 시대 가난한 집 딸이 살아가는 법
결혼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얻어 생계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그녀의 결혼생활은 생각보다 순탄치 않았던 듯하다. 18살이 되던 해인 1914년 12월10일에 남편과 이혼을 했다. 결혼한 지 불과 몇 년 만의 일이다.
그해 5월에는 아버지 김인영이 사망을 했고 생계가 막막해진 가족들은 그나마 의지가 될 만한 여동생을 따라서 남수리 202번지로 이주를 해왔다. 남수리 202번지는 김향화가 수원의 대표기생으로 활동하던 1919년까지 거주하던 곳이다. 정확한 이혼 사유는 알 수가 없다. 김향화는 이혼 후에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당시는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도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어쩔 수없이 기생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 기생으로 활동하기에 적합한 이름이 필요했고 순박한 순이(順伊)에서 향화(香花)로 변경한 듯 하다.
기생이 되기 위한 기예는 수원지역에 있던 기생조합이나 권번에 들어가서 배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설에는 1911년 15살의 나이로 기생조합에 들어갔다고 하나 기록으로 확인된 바가 없다. 아마도 이혼을 하고 나서 생계 방편을 마련하기 위해 기생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나이가 18살이다. 기생이 되기 위해 훈련 받기 시작하는 나이가 10세 전후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아주 늦은 나이에 기생이 된 것이다. 기녀 수업을 언제 어떻게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1918년에 만들어진 ‘조선미인보감’에 의하면 검무, 승무, 정재춤,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 등을 잘했고 수원을 대표하는 기생으로 소개하고 있다.
당시 수원기생은 개성기생 못지않은 기예와 풍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늦은 나이에 기생이 된 김향화가 수원의 대표기생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몇 년 동안의 눈물나는 노력의 결과였을 것이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어린 처자의 눈물이 느껴진다.
“온갖 계책으로 봄을 머무르게 하되 봄은 사람을 머무르게 하지 못하고 만금은 꽃을 애석해 하지만 꽃은 사람을 애석해 하지 않아, 나의 푸른 쪽진 머리, 주홍 소매를 쥐고서 한번 넘어지면 이십 광음이 끝나도다.
누가 가곡이 근심을 능히 풀 수 있다 말하는가. 가곡은 일생의 업원이로다. 본디 경성 성장으로, 화류 간의 꽃이 되어, 삼오 청춘 지냈구나, 가자가자 구경 가자, 수원산천 구경 가자, 수원이라 하는 곳도, 풍류기관 설립하여, 개성조합 이름 쫓네, 일로부터 김행화도, 그 곳 꽃이 되었세라,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죽은깨가 운치 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등 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 (조선미인보감 김향화)
김향화는 1919년 2월25일 남수리 202번지에서 201번지로 분가를 했다. 기생으로서 자리도 잡았지만 기생이라는 직업자체가 떳떳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가족의 생계도 안정이 됐기 때문에 분가를 한 것 같다.
그러나 1919년 운명적인 사건이 그녀의 삶을 바꿔 놓았다. 23살이 되던 해인 1919년에 고종임금이 승하하셨는데 소문에 의하면 일본인들이 고종임금을 독살한 것이라고 한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나라가 망하니 임금도 독살을 당한다는데 민초들의 삶이 고단하기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기생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1919년 1월27일에 고종임금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이었다. 이날 소복을 곱게 차려입고 기생동기들 20여명과 함께 수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서 덕수궁 대한 문 앞에 백성들과 함께 곡을 했다.
김향화도 기생이기 이전에 조선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3월1일에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수원에서는 3월 16일 만세시위가 시작됐고 27일에는 수원역에서도 그리고 시장상인들이 상점문을 닫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김향화와 수원기생 33인도 여기에 지지 않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29일 기생들을 대상으로 자혜의원에서 정기적으로 위생검진이 이뤄지는 날이다.
김향화와 일행은 자혜의원으로 가는 길에 경찰서 앞에 이르러 대담하게 독립만세를 불렀다. 검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다시금 만세를 불렀는데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을 지켜본 사람들이 합세하면서 시위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만세를 부르던 날 김향화는 망해가는 조선의 딸이었고 독살 당했다는 고종임금에 대한 의리와 절의를 지킨 신하였으며 한편으로 위생검진이란 이름하에 자행된 일제의 여성 인권유린에 분노하는 여성이었다.
1905년 소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조선인 창기에 대한 단속이 강화돼 성병검사가 진행됐다. 위생검사는 사람들이 보는 앞마당에서 칸막이를 설치하고 옷을 벗어 성기를 노출시키는 방법으로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검사 방법이었다. 너무나도 강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처사였다.
자혜의원에서 위생검사를 받은 김향화와 기생들 33인에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망국의 설움과 인간 취급받지 못하는 기생의 처지에 대한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자신들의 처지와 조선의 운명이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김향화와 기생들은 경찰서로 잡혀갔다. 김향화는 일제의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만세를 불렀다.
2개월여의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밥법원 수원지청 검사 분국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고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녀들의 만세운동은 1919년 6월 20일 매일신보에 실리기도 했다. 1919년 11월2일 김향화는 가출옥 상태로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 소리없이 사라질 지라도 내 나라를 지키고 싶었소.
김향화는 그렇게 6개월간의 심한 옥고를 치렀다. 그녀가 기생들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탓에 가족들에게도 여파가 미쳤다.
기생이 돼야 했을 정도로 빠듯하고 어려운 살림이었는데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면서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옥고를 치루고 나온 뒤 그녀의 행적을 추적할 만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추적해 본다면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아야 할 만큼 힘들었던 것 같다.
게다가 김향화는 기생일도 그만둔 것 같다. 1925년 신문에 수원예기조합 명단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곳에도 그녀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기생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가족들도 생계유지를 위해서 다른 방편을 찾아야 했다.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자 가족들은 수원을 떠난 것 같다.
김향화는 1934년에 향화라는 기생이름을 버리고 우순(祐純)으로 바꿨다. 기생 시절에 사용했던 향화라는 이름을 쓸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지나간 시절에 대한 회한이 묻어나는 이름을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시기는 다르지만 여동생 점순은 화자(和子)로, 오빠 창환은 영석(永石)으로 이름을 바꿨다.
여동생과 오빠의 경우 1940년 창씨 개명 과정에서 이름을 변경한 듯하다. 우순으로 이름을 바꾼 이듬해 1935년에 나이 39살의 늙은 중늙은이가 되어버린 김향화는 경성으로 이주를 했다. 어머니와 오빠 김창환은 1930년을 전후로 경북으로 이주를 한 듯하다.
어머니 홍금봉이 1930년에 경북 김천군에서 사망을 했고 2년 뒤인 1932년에 오빠 김창환은 경북 달성군에서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가 어머니 친정이었는지 선대 연고가 있었던 곳이었는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어쩌면 기생 여동생의 만세시위 사실이 알려지지 않는 곳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오빠 김창환은 나이 42세에 혼인신고를 하면서 결혼 전에 낳은 아들 동철(東澈)을 비로소 호적에 올릴 수 있었다.
정식 혼인 관계에서 얻은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결혼을 할 수 없는 정도로 경제적으로 열악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동생 점순의 행적도 알 수 없다.
그녀는 딸 둘을 낳아 키웠는데 모두 아버지의 호적에 오르지 않는 상태였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사회적 약자이고 경제적으로 여러움에 노출된 사람들의 처지가 얼마나 열악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꽃같은 나이에 수원으로 들어와 25년을 살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꽃같은 얼굴과 구슬픈 목소리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기생 김향화였지만, 만세운동 이후에 가족은 흩어지고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에 시달렸으며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팔려가듯이 늙은 남편과 결혼을 해야 했고 이혼 후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처지는 식민지 조선의 자화상이다.
김향화는 식민지 시대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였던 가난한 집 딸이었고 천대받던 기생이었지만 조선의 독립을 당당하게 외쳤던 인물이었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키듯이 조선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김향화는 역사의 아픈 상처로 남아있다. 지난 2009년 4월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표창장과 훈장메달은 수원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류현희(수원시사편찬위원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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