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낭중지추(囊中之錐)

김동언.jpg
예술은 송곳이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묻혀 있던 감성을 자극하여 따뜻한 피를 돌게 하고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꿈을 생각나게 한다. 작품 속에 담긴 예술가의 정신은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의 권태로움을 벗고 신선한 감동과 생생한 세계를 눈앞에 펼칠 수 있게 만든다.

어느 시대나 예술가들은 자신의 정신과 작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고 시대를 뚫고 나오기 위해 오랜 세월 자신만의 송곳을 예리하게 갈고 닦는다. 그 송곳의 끝에는 창의적이고 신선한 무엇이 묻어날수록 좋다. 장구한 인류 역사 속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명멸하는 동안 송곳처럼 우뚝 솟은 예술가들의 사례가 이를 증명해준다.

 

훌륭한 예술가와 예술작품은 박제화된 과거의 형식과 정신을 답습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사회를 제시해왔다. 위기와 역경에 처한 시절에는 예술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의문을 던지며 인간 본연의 모습을 돌아보게 해주는 역할도 하였다.

주머니 속에 가만히 넣고만 있어도 그 끝이 뾰족해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처럼, 창의적 과정의 산물이며 인간 정신활동의 최고 결정체인 예술은 주머니 같이 평범한 우리의 삶에서 송곳처럼 삐져나와 자리를 하게 된다.

낭중지추(囊中之錐)란 중국 ‘사기(史記)’에 나오는 말로 ‘주머니 속의 송곳’이란 뜻이다. 뛰어난 재주나 강한 개성은 도드라져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고사성어다.

 

지난 주말 국립극단 주연배우 출신의 이상직이 제작한 연극 한 편을 보기 위해 전라남도 구례에 다녀왔다. 이상직은 2000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대상’, 2004년 ‘히서연극상 올해의 연극인상’을 받는 등 국립극단의 주요작품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며 많은 팬을 확보한 주목받는 연극배우였다.

 

유명배우의 길을 접고 갑작스레 귀농해 농사를 지으며 연극을 만드는 그의 작품이 궁금했다. 2010년 창단한 극단 ‘마을’은 이상직을 제외하면 배우를 직업으로 가진 적 없었던 지역의 주부, 농민, 교사, 학생 등으로 구성된 외형상 아마추어 극단이다.

 

하지만 일견 초라한 이 극단이 창단공연부터 주목을 끈다. 2012년 2월 18~19일, 구례 섬진아트홀의 객석 300을 모두 채우고 통로에까지 관객이 앉았다는 소문은 구례를 떠나 서울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창단공연 ‘인생콘서트 39°5’ 이후로도 ‘마실 가세’, ‘슈퍼마켓 습격사건’, ‘우리 읍네’ 등의 작품을 꾸준하게 무대에 올리며 지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종일 내리는 가을비에도 구례문화예술회관은 소문대로 관객이 차고 넘쳤다. 공연 3일째, 150석 객석이 모자라 20명이 넘는 관객은 통로에 불편하게 앉아 연극을 관람했다. 학생배우의 어머니와 돈은 없지만 연극을 꼭 보고 싶다던 지역민 포함, 단 2명만 무료관객이고 나머지는 모두 유료관객이었다. 4일간 700명 정도가 연극을 관람했다고 추산된다. 

구례군의 인구 2만 5천 명 중, 어린아이와 고령의 노인을 제외하면 극단 마을에 보내는 지역민들의 관심과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놀라운 변화는 또 있다. 이번 작품에 출연한 배우 중에는 인근 곡성과 순천에서 참가한 이도 있었다. 인근 지역으로 확산이 이루지고 있는 것이다. 또 대학로에서 연출하던 사람, 배우가 구례로 와서 극단에 합류했다. 그곳에 창작집단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연극이 지역공동체에 큰 동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상업성에 오염되지 않고 제도와 권력에 의존하지 않은 연극정신이 이렇게 한 번씩은 뚫고 나와야 한다. 송곳처럼.

 

김동언 경희대학교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교수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