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Q! CQ! 내 이름은 DS2HRE”
경기도 용인시 봉무도 만년슈퍼. 임만봉 할아버지(68)가 방안에 복잡하게 설치된 기계장치를 이리저리 조작한다. 그러자 무전기 안에서 들려왔던 희미했던 목소리가 조금씩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몰두하던 임 할아버지가 이윽고 머리를 돌렸다.
“오늘은 가을하늘만큼이나 감도가 매우 좋습니다. 청명하게 아주 잘 들리네요.” 할아버지의 방 한 구석을 가득 메운 건 무선장비다. 흔히 ‘햄’(HAM)이라 불리는 아마추어무선통신설비.
아마추어무선은 임 할아버지의 유별난 취미이자, 또 다른 타이틀이다. 아마추어무선의 세계에서 임 할아버지의 이름은 DS2HRE. 이 콜 사인과 함께한 세월도 벌써 50년이다.
호텔 지배인에서 슈퍼마켓 주인으로
지금은 무선장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임만봉 할아버지가 처음부터 무선통신 장비와 밀접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들보다 멀면 더 멀었다. 충북 충주 태생의 임 할아버지는 사실, 호텔리어(?) 출신이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경희대 호텔경영학을 전공했다. 지금에야 인기 직군이 됐지만, 당시는 아니었다. 호텔도 부족했고, 숙박 서비스에 대한 인식도 낮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과 경기지역 호텔을 오가며 지배인 일을 맡아했다. 이 때까지도 무선통신과 인연은 없었다. 그런 게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안에 설치된 무선통신장비. 임 할아버지는 이 장비를 토대로 전국 어디서든, 아마추어무선 통신을 즐기고 있다
임 할아버지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전공을 생각하면 행정에 밀접했지만, 통신을 선택했다. 나름대로의 방향이 있었다. 군대고 결국, 사회의 연장이라 봤다. 무선통신이 각광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고리타분한 행정대신 자격증도 따고, 기술도 배울 수 있는 분야로 여겼다.
그것은 ‘신의 한수’였다. 그의 성격과 잘 맞아 떨어졌다. 무엇보다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음성에 반응하고, 숨겨진 전파를 찾고, 원활한 통신환경 구축을 위해 안테나를 세우고, 거기에 기계 특유의 멋(?)까지 있었다. 같은 동기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깊고 빨리, 무선통신의 세계에 빨려들었다. 통신병 배치 후 얼마 되지 않아, ‘무선통신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50년 가까이 이어지는 무선통신과의 인연은, 그렇게 찾아왔다.
軍에서 배운 무선통신 자격증이 계기
군대에서 무선통신사 자격증을 따기는 했지만, 제대 이후 큰 일상의 변화나 영향은 주지 못했다. 집과 호텔을 오가는 반복된 일상. 그 사이 무선통신이 낄 틈은 없었다. 산업화와 도시화와 진행되면서 호텔업도 자연히 부상했다.
일에, 사람에 치여 스스로를 돌아볼 여력은 없었다. 게다가 인력이동이 빠른 호텔업의 특성상 출장과 전보가 잦았다. 때문에 무선통신에 관심과 애정은 있어도, 취미 이상의 의미는 가지지 못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뜻하지 않은 퇴직이었다.
40대 초반. 호텔을 나왔다. 그가 용인의 리조트에 근무했을 때다. 서비스업의 특성상 다른 직군에 비해 퇴직 시기가 빨랐다. 같은 학과를 전공한 젊은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이유도 있었다.
어찌됐든, 퇴사는 예고 없이 날아들었다.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슈퍼였다. 퇴직금과 모은 돈을 털어, 지금 살고 있는 용인 봉무리에 슈퍼가 딸린, 1층짜리 건물을 짓는다.
호텔 일을 할 때보다, 시간적 여유가 늘면서 무선통신에 대한 욕망(?)도 자연히 꿈틀댔다. 조심조심 기계를 하나씩 하나씩 사 모았다. 고가인 탓에 아내에게는 비밀이었다. 다행히도 80~90년 대, 무선통신의 인기가 날로 치솟았다. ‘귀족 레포츠’로 각광 받기 시작했다.
아마추어무선통신사가 늘면서 재미도 더 붙었다.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 휴대폰이 전무했던 시절, 지금의 스마트폰은 상상할 수 없는 시절. 무선통신은 그 시대의 인스타그램이자, 페이스북, 카카오톡이었다.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아마추어무선에 빠져들었어요.
더 높은 안테나, 출력 좋은 무선장비를 구입해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의 아마추어무선통신사들과 대화하는 재미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흥분이죠. 단 한 번도 아마추어무선에 입문한 걸 후회해본 일이 없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흐흐)
아마추어무선으로 재난 지원 등 공익활동
아마추어무선이 여러 공익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사실 걱정되는 지점도 많다. 미래에 대한 부분이다. 90년대 후반까지, 아마추어무선은 연맹회원 만도 10만 명에 달할 정도로 각광받는 레포츠였다. 하지만 휴대폰이 등장하고,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자연스레 도태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더불어 아마추어무선사의 고령화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경기도본부 산하에 65세 이상으로 구성된 ‘시니어클럽’을 운영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현재 임 할아버지가 ‘시니어클럽’ 회장으로 4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활동 중에 있다.
“아마추어무선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고, 또 보람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활동입니다. 최근에는 국산이나 중국산 무선기기도 만들어지면서 가격도 많이 저렴해졌고요. 무엇보다 타인과 소통을 하면서 감수성과 친화력 향상은 물론 노인들의 치매예방에도 훌륭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알려졌습니다.
혹시나 어렵지 않을까, 비싸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다면 고심마시고 무선연맹 경기본부나 용인시지부를 찾아주시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노년의 인생이란 게 별 것 있나요. 결국, 재밌게 사는 거죠.”
글 = 박광수기자 사진 = 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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