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 신춘호의 ‘압록강 단교 기념조각’

기념물이 되어버린 ‘고전적 혁명유적지’

2015년의 마지막 날이에요. 한 해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저는 올해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 식민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던 1945년을 떠올리며 우리 민족에게 가장 상징적인 작품들을 찾아보아야겠다고 다짐했지요. 독립과 민족해방 70주년의 의미가 작지 않았기 때문이죠. 게다가 625한국전쟁으로부터도 65년이 흘렀잖아요.

 

8월 18일 아침, 저는 6.25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 단교(斷橋)위에 서 있었어요. 신연암로드 추진단의 첫 출발지가 단둥(丹東)이어서 그 참에 단교를 찾았던 것이죠. 중국 단둥과 북한 신의주를 연결했던 그 다리는 1911년에 준공되었고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라 명명했으나, 지금은 강 건너 북한 쪽 구간이 아주 정교하게 폭파된 채 을씨년스럽게 남아있을 뿐이었어요.

 

저는 단교 위로 올라가 다리 끝까지 걸어가서는 강 건너의 북한을 바라보았죠. 마흔 여덟에 눈앞에서 본 북한은 지금까지 학습된 북한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현실의 시간과도 아주 무관한 듯했어요. 이쪽의 현실과 저쪽의 현실 사이를 압록강이 흐르는 것, 오롯하게 그것만이 강력한 현실처럼 보였죠. 강은 두 개의 현실을 나누지 않고 뒤섞어서 서해로 나아갔으니까요.

 

중국은 단교 위에 최근 사회주의 리얼리즘 기념조형물인 를 세웠어요. 1950년 10월 19일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 30만 명의 중공군을 이끌고 이 단교를 건너 북한으로 걸어 들어갔어요. 그들에게 한국전쟁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어서 미국을 몰아내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게 목적이었죠. 기념조각은 펑더화이와 중공군이 사회주의의 연속혁명을 위해 한 걸음[進一步]을 내 딛는 장면을 형상화했더군요.

 

그러나 기념조각의 청동 인물들은 그 자리에 무겁게 굳어서 ‘기념물’이 되었을 뿐 더 이상 연속혁명의 생물은 아니었어요. 그들이 바라보는 철교의 끝은 완전히 끊어져서 건너지 못할 것이었고, 그들 뒤로 바짝 붙어서 위용을 뽐내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거대한 자본주의였으니까요. 펑더화이와 마오쩌둥의 사회주의는 북한에 남았으나 그들의 자리는 ‘고전적 혁명유적지’에 불과했죠.

 

사회주의 기념 조형물과 그 뒤에 펼쳐진 단둥의 자본주의는 그래서 역설이었고 카오스였어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북한의 마른 풍경과 달리 이쪽의 단둥은 기름진 도시의 급성장이 노골적이었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 단교 옆 신 철교 위를 레미콘 차량과 화물차와 관광버스가 줄을 이어서 들고 나더군요. 마치 이제는 북한에 자본주의를 건설하려는 듯 말예요.

 

그래서일까요? 일순간 펑더화이와 그를 따르는 중공군의 기념조각이 텅 빈 껍데기처럼 가벼워 보이더군요. 펑더화이의 발밑에 새긴 ‘평화를 위하여’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김종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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